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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 신라 불교의 기초, 묵호, 아도, 담시 이야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2/3 - 2/3 왕 즉위 3년, 그때 성국공주가 병이 들었다. 무의(고대 무당의 일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인간의 질병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무당이 곧 의사였음)는 누구도 그 병을 고치지 못했다. 왕은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공주의 병을 낳게 할 의원을 찾아오도록 했다. 이때 아도사가 문득 대궐로 들어가 그 병을 치유시켰다. 미추왕은 크게 기뻐하여 아도에게 소원을 물었다. 아도사는 왕께 소원을 말했다. “저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다만 천경림에다 불사를 세우고 크게 불교를 일으켜 이 나라를 복되게 빌고 싶을 뿐입니다.” 왕은 기꺼이 허락하고 공사를 시작하도록 명했다. 당시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집을 덮었다. 아도는 여기서 머물면서 교법을 강설했다. 그러노라면 때때로 천화가 떨어지곤.. 더보기
아도기라(阿道基羅), 신라 불교의 기초, 묵호, 아도, 담시 이야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1/3 - 1/3 제4권에 있는 기록이다. 제 19대 눌지왕 때에 사문(사라마나, ‘식심’, ‘공로‘라 번역되며, 부지런히 모든 좋은 일을 닦고 나쁜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도나 외도를 불문하고 처자권속을 버리고 수도 생활을 하는 이를 총칭한다. 그러나 후세에는 오로지 불교에서의 출가, 수도하는 일을 가리키게 되었다. ’비구‘와 같은 뜻)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을 말함)에 들어왔다. 그 고을에 사는 사람 모례(’모륵‘이라고도 함)가 그를 맞아 자기 집에다 굴을 파고 안치시켰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의복류와 향을 전해 왔다(고득상의 영사시에는 양나라에서 원표란 시승을 시켜 명단, 불경, 불상 들을 보내 왔다고도 함). 그러나 신라의 군신들은 향의 이름도, 용도도 몰랐.. 더보기
여부남(餘扶南), 즉 전백제(前百濟), 백제의 건국과 흥망성쇠, 주몽의 아들 온조와 비류,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2/2 - 2/2 온조는 하남 위례성(지금의 직산. 하남 위례가 직산이라는 설은 일찍이 그릇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남 위례는 현재의 광주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서 그 열 사람의 신하들을 그의 보익으로 하여 군호를 ‘십제’라 했다. 그것은 한나라 성제 15(기원전 18)년의 일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짰기 때문에 안거할 수가 없어 되돌아왔다. 돌아와, 바야흐로 위례에 도읍이 자리 잡히고 인민들이 편안히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마침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죽고 말았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백성들이 즐거워했다고 해서 그 뒤 국호를 ‘백제’(국호인 백제는 그 이전 백제의 명칭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여기 ‘백성들이…….’ 운운한 한자에 구애된 부회일 것.. 더보기
여부남(餘扶南), 즉 전백제(前百濟), 백제의 건국과 흥망성쇠, 주몽의 아들 온조와 비류,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1/2 - 1/2 부여군은 전 백제의 왕도다. 또는 소부리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를 보면 ‘백제 성왕 16(538)년 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 하고, 그 주석에 ‘그곳 지명은 소부리,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이요, 소부리란 부여의 별호다.’ 라고 했다. 또 양전장적(고려 시대의 토지 측량 대장)을 보면 소부리군 전정주첩이라고 씌어 있으니 오늘날 부여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옛 이름을 회복한 것이다. 백제 왕족의 성이 부여씨이기 때문에 그렇게 알려진 것이다. 또는 또 여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 부여군의 서쪽 자복사의 고좌에 수장이 있어 그 자수 무늬에 통화 15년 정유 5월 여주 공덕대사 수장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이다. 또 옛적에 하남에 임주 자사를 두었는데, 그때의 도적 속에 ‘여.. 더보기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처용가의 전설, 역신(일종의 병으로 마마 또는 천연두)가 무서워하는 처용, 신라의 마지막,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제49대 헌강왕 때에 신라는 서울을 비롯하여 시골에 이르기까지 즐비한 주택과 담장이 잇달아 있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거리에는 항상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철 기후는 순조롭기만 했다. 이렇게 나라 안이 두루 태평의 극을 누리자 왕은 어느 한때를 타서 신하들을 데리고 개운포(학성 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 현재의 울산시)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다. 놀이를 마치고 서울로 행차를 돌리는 길에 왕 일행은 잠시 물가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바다에서 구름이랑 안개가 자욱이 끼어 덮여 오면서 훤하던 대낮이 컴컴하게 어두워지고 행차가 나아갈 길조차 어둠 속으로 흐려 들어갔다. 이 갑작스런 변괴에 놀라 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어 보았다. 일관이 있다가 왕의 물음에 답했다.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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