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이야기> - 1/2
부여군은 전 백제의 왕도다. 또는 소부리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성왕 16(538)년 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 하고, 그 주석에 ‘그곳 지명은 소부리,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이요, 소부리란 부여의 별호다.’ 라고 했다.
또 양전장적(고려 시대의 토지 측량 대장)을 보면 소부리군 전정주첩이라고 씌어 있으니 오늘날 부여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옛 이름을 회복한 것이다. 백제 왕족의 성이 부여씨이기 때문에 그렇게 알려진 것이다.
또는 또 여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 부여군의 서쪽 자복사의 고좌에 수장이 있어 그 자수 무늬에 통화 15년 정유 5월 여주 공덕대사 수장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이다. 또 옛적에 하남에 임주 자사를 두었는데, 그때의 도적 속에 ‘여주’란 두 글자가 적혀 있다.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의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인용,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에 ‘삼한은 모두 78개의 나라로 되어 있는데 백제는 그 중의 한 나라다’라고 했다.
<북사>에는 ‘백제는 그 동쪽으로 신라에 잇닿았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한강에 접했다. 그 도읍(원문에는 ’군읍‘으로 되어 있으나 ’도읍‘의 오자이므로 도읍이라 고쳤음)은 거발성, 그것은 또 고마성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 또 오방성이 있다.’라고 했다.
<통전>에서는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서 그 동북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월주에,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왜에 이르고,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 그 왕의 거주하는 곳으로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에는 ‘백제는 그 서쪽으로는 월주와 경계하고 남쪽으로는 왜와 경계했는데 모두 바다를 넘어서다. 그리고 북쪽에는 고구려다.’라고 했다.
<삼국사 본기>의 기록이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 또는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화난을 피해 도망해 나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졸본주의 왕에게는 왕자는 없고 다만 딸 셋만 있었다. 졸본주의 왕은 주몽을 보고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서 그의 둘째딸을 시집보내어 그를 사위로 맞았다.
그 뒤 오래지 않아 졸본주의 왕은 죽고 주몽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 주몽은 그 졸본주 왕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이 비류요, 둘째 아들이 온조다.
이들 비류와 온조는 나중에 태자에서 용납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마침내 오간과 마려 등 열 사람의 부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비류와 온조 일행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부아악에 올라가 근거지가 될 만한 땅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다 근거지를 잡으려고 했다. 열 사람의 그 부하들은 비류에게 간했다.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멧부리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기름진 들이 펼쳐져 있으며,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어 그 천연으로 이룩된 요새의 이로움으로 보아 얻기가 어려운 지세이온데 이곳에서 도읍을 일으키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비류는 부하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따라온 백성들을 아우 온조와 나눠 미추홀(지금의 인주로, 현재의 인천 부근을 말함)로 자리 잡았다.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