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의 음모, 호구룡, 당 황제의 여의주> - 2/2
왕 즉위 11(795)년에 당나라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다 돌아갔다. 사자가 떠난 하루 뒤에 두 여인이 내정에 나와 아뢰었다.
“저희들은 동지와 청지(청지는 동천사의 샘이다. 그 절의 기록에 의하면 이 샘은 동해의 용이 오가며 설법을 듣던 곳이라고 한다. 젊은 진평왕이 세운 것으로, 오백성중과 오층탑 및 전민을 아울러 헌납했음)의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저희들의 지아비인 두 용과 그리고 분황사(경주시 구황리에 있다. 선덕여왕 3(634)년에 창건, 원효대사가 있었던 절) 우물의 용, 이 세 용에게 마법을 베풀어 그들을 조그만 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다 담아 가지고 떠났습니다. 바라옵건데, 폐하께서는 그 두 하서국 사람에게 경고하여 저희들의 지아비들과 다른 또 한 용, 이들 호국룡을 이 땅에 머물게 하십시오.”
왕은 곧 뒤쫓아 하양관(하양은 지금의 영천의 서쪽, 대구로 가는 길목에 있음)에 이르러 그들 일행을 만났다. 거기서 왕은 친히 연회를 열어 주고는 그 하서국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너희들은 어째서 우리의 세 용을 잡아가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고 말겠다.”
그러자 그 하서국 사람들은 세 마리의 고기를 꺼내어 왕에게 바쳤다.
돌아와 그 세 마리의 고기들을 각기 제 곳에다 놓아주었더니 세 곳의 물이 각각 한 길이 넘도록 튀어 오르고 고기들은 기뻐날뛰며 깃들어 갔다. 당나라 사람은 원성왕의 명철함에 감복했다.
원성왕은 어느 날 황룡사(어떤 책에는 화엄사 또는 금강사라고 하는데, 아마 절 이름과 경명을 혼돈한 듯함)의 승려 지해를 대궐로 청해 들여 50일 동안 화엄경을 송독케 했다. 지해를 따라온 사미 묘정은 매양 금광정(‘금광정’이란 이름은 대천법사로 말미암아 얻은 것임)가에 가서 바리때를 씻었다. 그 우물에는 한 마리 자라가 있어 친구하곤 했다. 묘정 사미는 바리때를 씻을 때마다 그 자라에게 밥찌꺼기를 먹이면서 장난하곤 했다.
법석이 끝나려 할 즈음에 묘정 사미는 그 금광정의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풀어 온 지가 오래다.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는가?”
수일 후에 그 자라는 한 개의 조그만 구슬을 토해 내선 모정 사미에게 주려는 뜻의 시늉을 했다. 묘정은 그 구슬을 받아 허리띠 끝에다 매달았다. 그런 뒤로는 왕이 묘정을 귀애하여 그를 내전으로 맞아들여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때 한 잡간(신라 관등의 제3위인 잡찬의 별칭)이 마침 당나라로 사신을 가게 되었다. 이 잡간 또한 묘정 사미를 무척 귀애했다. 그래서 사신 길을 함께 가게 해주기를 청했다. 왕은 허락해 주었다.
함께 당나라에 들어갔더니 당나라의 황제 역시 묘정을 보고는 총애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정승이며 임금 좌우의 신하들이 묘정을 높이고 귀엽게 여기지 않은 이라곤 없었다. 이 모양을 본 관상쟁이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 사미를 살펴보니 도무지 길상이라곤 한 구석도 없는데, 이렇게 남들에게 귀염과 존경을 받고 있으니 필경 이 사미에게는 그 몸에 신기한 물건을 지닌 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황제는 사람을 시켜 묘정의 몸을 뒤져 보게 했다. 허리띠 끝에 매단 그 조그만 구슬이 발견되었다. 그 구슬을 보고 나서 황제는 말했다.
“내게 여의주 네 개가 있었는데 전년에 그 중의 한 개를 잃어버렸더니만, 이제 그 구슬을 살펴보니 바로 내가 잃어버렸던 그것이로구나.”
황제는 그 구슬을 가지게 된 유래를 물어 보았다. 묘정 사미는 그 사실을 자세히 진술했다. 황제가 여의주 한 개를 잃었던 날이 묘정 사미가 자라에게서 구슬을 얻은 날과 같은 날임이 밝혀졌다. 황제는 그 구슬을 받아들이고 묘정을 돌려보냈다. 그 뒤로는 아무도 이 사미를 귀애하고 예쁘게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원성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골짜기에 있는 곡사(지금의 숭복사, 경상북도 월성군 외래면 말방리에 있다고 함)에 위치하고, 최치원이 찬술한 바 있다(원성왕의 장례에 관해 <삼국사기>는 ‘왕의 유언에 의해 영구를 봉덕사 남쪽에 화장했다’고 쓰여 있음).
또 왕은 보은사와 망덕루를 세웠다. 왕의 조부인 훈입 잡간을 흥평대왕으로, 증조인 의관 잡간은 신영대왕으로, 법선 대아간은 현성대왕으로 각각 추봉했다. 현성의 아버지는 바로 마질차 잡간이었다.
- 끝 -
<<삼국유사>> 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