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가져오는 신비한 피리>
제31대 신문대왕의 이름은 정명, 성은 김씨였다. 당 고종 32(681)년 7월 7일에 즉위하여 부왕인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 가에 감은사(감은사 냉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이절을 짓다가 끝내 못하고 붕어하여 해룡이 되고,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당나라 고종 33(682)년에 낙성했는데, 금당 섬돌 아래 동쪽으로 향한 굴이 뚫려 있으니 그것은 용이 들어와 서리고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왕의 유소에 의해 그 유골을 간수한 곳으로 이름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 이름도 감은사라 했다. 나중에 용의 현형을 본 곳은 이건대라고 불렀다. 감은사는 경상북도 월성군 양북면 용당리에 있었다. 지금도 그 옛터에는 3층 석탑이 있다. 이견대라는 명칭은 <주역>의 ‘용비재천, 이견대인’에서 취해 온 것임)를 세웠다.
그 이듬해(다른 한 책에서는 당나라 중종 7(690)년 이라고들 하지만 잘못임) 5월 초하룻날이다. 해관(신라 관등의 제 4위) 파진찬 박숙청이 와서 동해에 한 작은 산이 나타나 감은사 쪽으로 떠와선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한다고 아뢰었다. 왕은 신기하게 여기고 일관 김춘질(또는 ‘춘일’이라고도 씀)에게 점을 쳐 보게 했다.
“돌아가신 선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이 삼한 땅을 눌러 지키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또 김유신공은 본래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내려와 대신이 되어 있습니다. 두 성인이 의기를 같이하여 시방 나라를 지킬 보기를 내시려하오니 만일 혜하께서 해변으로 가시면 이루 값할 수 없는 큰 보배를 반드시 얻게 되리다.”
일관의 첨친 결과를 듣고 신문왕은 기뻤다.
그달 7일에 왕은 이견대에 나아가서 바다에 뜬 그 작은 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산세는 마치 귀두와 같고 그 위에는 한 줄기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어 있다가 밤이 되자 하나로 합하더라고(일설에는 산도 역시 대나무와 마찬가지로 밤낮에 따라 개합했다고 함) 사자가 와서 보고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었다.
이튿날 오시에 그 대나무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그때 천지는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 세상은 혼돈한 어두움에 잠겨 들었다. 비바람과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혼돈한 어두움의 상태는 7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비바람이 걷혔다. 그리고 바다는 평온해졌다. 왕은 배를 타고 그 산으로 들어갔다. 산에 오르자 왕에게 검은 옥대를 바쳐 오는 용이 있었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았다. 그리고 물어 보았다.
“이 산과 대나무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는 것은 어쩐 일인가?”
용은 대답했다.
“비유컨대,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뼉을 마주 쳐야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는 본시 합한 뒤에야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훌륭하신 대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대왕은 이 대나무를 가져가시어 피리를 만들어 불어 보십시오. 그러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왕의 돌아가신 아버님께선 바다의 큰 용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유신 장군은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거룩한 이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이루 값할 수 없는 이 큰 보배를 내리시고는 저로 하여금 왕께 바치게 하신 것입니다.”
용의 말을 듣고 왕은 놀랍고도 기뻤다. 오색 비단과 금옥으로 용에게 보답했다. 그리고 사자를 시켜 그 대를 베어 내게 했다. 왕 일행이 대를 베어 바다에서 나오는 동안 그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밤을 감은사에서 묵고 17일, 왕 일행은 기림사(지금 경상북도 월성군 양북면 함월산에 있다. 선덕여왕 즉위 12(643)년에 창건, 자는 ‘기로’로 음독되기도 함)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 태자 이공(효소대왕을 일컬음)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서는 말을 달려 와서 축하했다. 그리고는 찬찬히 옥대를 살펴보더니 왕에게 아뢰었다.
“이 옥대의 쪽들이 모두 참 용들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왕이 묻자 태자는 그 옥대의 쪽 하나를 떼서 물에 넣어 놓고 보면 아실 거라고 답했다.
이공태자의 말대로 옥대의 왼편 두 번째의 쪽을 떼서 시냇물에 넣어 보았다. 그 옥대의 쪽은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올라가고 난 자리는 못이 되었다. 그 못을 용연이라 불렀다.
수레는 궁으로 돌아왔다.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했다. 그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든 사람이 나아졌다. 그 피리 소리는 가물 땐 비를 내리게 하고, 장마 질 때는 비가 개게 했다. 그리고 바람을 가라앉히고 물결을 잠재웠다. 그래서 그 피리를 이름하여 ‘만파식적’(‘모른 파랑을 그치게 하는 피리’라는 뜻)이라 했다. 그것은 국보로 일컬어졌다.
효소대왕 때에 이르러, 즉 당 중종 10(693)년에 적군의 포로에 잡혀 갔던 부례랑이 살아 돌아오게 된 기적에 연유되어 그 피리에게 다시 ‘만만파파식적’이란 칭호를 내렸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에 보인다.
- 끝 -
<<삼국유사>>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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