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 통일과 김유신 장군> - 6/6
다음은 신라 <고전>에 적혀 있는 사실이다.
소정방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이미 토평하고 나서, 또 신라를 공벌하려는 심산으로 곧바로 본국으로 회군하지 않고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유신이 이 책략을 알아채고서 당나라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는 독주를 먹여 모두 죽게 한 뒤 쓸어 묻어 버렸다. 지금 상주 지경에 있는 당교가 바로 당군을 쓸어 묻었던 그 자리다(<당사>를 보면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는데,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실을 감추기 위함일까? 또는 신라 <고전>의 기록이 근거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년의 고구려와의 전역에 신라 사람이 소정방의 군사를 죽였다면 그 뒤 당 고종 19년에 어떻게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할 수 있었을까? 이로써 신라 <고전>의 기록이 근거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종 19년에 고구려를 멸한 뒤 신라가 당나라에 신복하지 않았던 사실은 있었지만 신라가 마음대로 정복한 땅을 점유했던 것 일뿐, 소정방, 이적 두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음).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이미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 신라왕은 장수들에게 명하여 잔적들을 추격해 잡도록 했다.
신라군이 한산성에 이르러 진을 치고 있는데 고구려와 말갈 두 나라 군사들이 공격해 와 신라군을 포위했다. 서로 공방전을 계속하여 5월 11일에서 6월 22일에 이르도록 고구려와 말갈 군사들의 포위는 풀리지 않았다. 신라군은 위경에 빠져 있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서 뭇 신하들을 모아 그 대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해 봤으나 모두들 머뭇거리고 선뜻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 즈음에 유신이 궁중으로 달려와 아뢰었다.
“일이 급박하옵니다. 사람의 힘으로서는 미칠 수 없고 오직 신술로나 구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유신은 곧 성부산에다 단을 모으고 신술을 베풀었다. 그러자 갑자기 큰 돌만한 광체가 단 위로부터 나타나더니 별이 날 듯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이 일로 인해 성부산이라 부르지만 산 이름이 성부산이 된 데는 다른 일이 있다. 도림의 남쪽에 유독 빼어난 봉우리 하나가 있으니 경주에 사는 어떤 사람이 벼슬을 얻으려고 그 아들을 시켜 횃불을 만들어 밤에 그 산에 올라가 쳐들게 했다. 그날 밤 서울 사람들이 그 횃불을 바라보고는 괴성이 나타났다고 떠들었다. 왕이 듣고서 근심스럽고 두려워 그 괴성의 재난을 없앨 사람을 공모했다. 횃불을 들어올리게 했던 그 아버지가 응모하려 했다. 그런데 일관이 왕에게 아뢰기를 이것은 큰 변괴가 아니라 단지 어느 한 집의 아들이 죽고 아버지가 울게 될 징조일 뿐이라고 하여 마침내 그 괴물을 물리칠 계획을 그만두었다. 그날 밤 그 아들은 산에서 내려오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한산성 안에 포위당해 있는 군졸들은 지원병이 오지 않음을 원망하면서 서로 바라보며 울고 있을 뿐이었다. 적군들이 공격을 서두르고 있는데 홀연히 한 광체가 남쪽 하늘로부터 날아와선 벼락불이 되어 30여 개소의 포석을 일거에 파쇄했다. 뿐만 아니라 적군의 활이며 화살이며 창 따위가 모두 부서지고, 적군들은 모두 땅바닥에 쓰러졌다. 얼마 뒤에 적군들은 깨어나 황황히 흩어져 달아나 버리고 신라군은 돌아왔다.
태종이 처음 즉위했을 때 어떤 사람이 머리 하나에 몸이 둘, 그리고 다리가 여덟 개나 달린 돼지 한 마리를 바쳤다. 이 돼지를 두고 ‘이것은 반드시 육합을 병탄할 상서로운 징조’라고들 말했다.
이 태종 연대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과 상아로 만든 홀을 착용했다. 그것은 자장법사가 당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가져온 것이다. 신문왕 때에 당 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말해왔다.
“나의 아버님께서는 현량한 신하 위징, 이순풍 등을 만나 마음을 합하고 의기를 같이하여 천하를 하나로 통합한 공훈이 있기 때문에 태종황제라 한 것이다. 그러나 너희 신라는 해외의 작은 나라로서 태종이란 칭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명호를 함부로 범함은 도리에 불충하니 빨리 그 칭호를 고치도록 하라.”
신라의 신문왕은 글을 올려 이에 답변했다.
“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기는 하나 성신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하나로 통합했기에 봉하여 태종이라 한 것입니다.”
신라왕의 글을 보고 당 고종은 자신이 아직 태자로 있을 때의 한가지 일이 생각났다. 즉 어느날 하늘에서의 외침, ‘33천의 한 사람이 신라의 탄강하여 유신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그것을 책에 기록해 둔 적이 있었다.
이제 그 기록을 찾아보고 당 고종은 사뭇 놀라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다시 사자를 신라에 보내어 ‘태종’이란 묘호를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 끝 -
<<삼국유사>> 제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