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 통일과 김유신 장군> - 4/6
백제군은 대패했다. 당나라 군사들은 강으로 밀려드는 밀물을 타고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선을 몰아 북을 울리며 진격해 올라왔다. 소정방은 보병이랑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도성 30리 지점에 와 머물렀다. 백제는 도성 안의 군사라는 군사는 다 동원하여 항거했으나 또 패배하여 전사자를 1만여 명이나 내었다. 당군은 승승장구, 바로 도성에 육박해 들었다. 의자왕은 미로서 함락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했다.
“후회막급이로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드디어 의장왕은 태자 융(효라고도 하지만 잘못임)과 함께 북쪽 변읍(‘북쪽 변읍’이란 웅진성이며 곧 지금의 공주를 일컬음)으로 도주해 갔다. 소정방은 도성을 포위했다. 의자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성안의 무리를 몰아 왕성을 고수하고 나섰다. 태자 융의 아들 문사가 그의 숙부인 태에게 불복하고 나섰다.
“왕과 그리고 태장이신 아버님께서 이미 이 왕성을 벗어나고 안계신데, 숙부께서 독천하여 왕이 되셨으니 만약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는 날에는 우리들의 신명이 어찌 안전하리까?”
문사는 종자들을 데리고 줄을 타 넘어 성을 나갔다. 그러나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정방은 부하 장졸들을 시켜 성채에 올라서서 당나라의 기치를 세우게 했다. 태는 궁지에 몰려 마침내 성문을 열고 목숨을 빌었다. 이에 의자왕 및 태자 융과 왕자 태와 그리고 대신 정복이 전국의 여러 성들과 더불어 모두 항복했다. 정방은 의자왕 및 태자 융과 연과 대신 및 장수급의 사람 88명과 그리고 백성 1만 2천 807명을 당나라의 서울 장안으로 호송시켰다.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 호가 있었는데, 이때의 당나라는 그 백제의 옛 영토에다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의 5도독부를 나누어 두고 수령을 뽑아 도독부 자사로 삼아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낭장 유인원을 시켜 백제의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 자위 낭장 왕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이명하여 백제의 유민들을 진무케 했다.
정방이 부로들을 이끌고 황제에게 알현하니 황제는 부로들을 일단 꾸짖고 나서 사면했다. 의자왕이 그곳에서 방사하자 당나라 조정에서는 그에게 금자광록대 부위위경의 작위를 주고, 그의 옛 신하들의 조상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손호(중국 삼국 시대 오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손권의 손자임)와 진숙보(중국 남조 진나라의 후주 이름)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게 하고 나란히 비석을 세워 주었다.
당 고종은 그 13(662)년에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임명했다가 곧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고쳤다. 소정방은 고구려군을 패강에서 깨뜨리고 마읍산을 점령하여 진영을 만들고 드디어 평양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마침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그는 돌아가 양주 안집대사로 임명되어 토번을 평정했다. 고종 19(667)년에 정방은 죽었다.
고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좌효기대장군 유주도독의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를 ‘장’이라 했다(이상은 <당사>의 기록).
<<신라별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문무왕 즉위 5(665)년 가을 8월에 왕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 행차하여 가왕 부여융(당나라가 백제 의자왕의 아들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고국에 돌아와 유민을 안무하게 했기 때문에 가왕이라 했다. ‘부여’는 백제왕의 성임)을 만나 단을 모으고 백마를 희생하여 맹세했다. 먼저 천신 및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드리고 난 다음에 백마의 피를 입에 바르고(고대 맹세의 한 의식으로 흰말을 베어 그 피를 입에 발랐음) 글로써 맹세 했다. 그 맹세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날 백제의 선왕(의자왕)은 거역과 순종의 도리에 어두워 이웃 나라와 우호를 도타이하지 않고 인척(백제의 무왕과 신라의 선화와의 결혼은 역사적인 사실로서는 의문시되고 있지만, 신라 소지왕 15년, 즉 백제 동성왕 15년에 백제와 통혼한 사실이 있음)과 화목하지 않는 한편,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포한 짓을 일삼아 신라를 침탈하여 성읍을 짓밟아서 거의 안락한 세월이 없었다. 천자(중국의 천자, 즉 당제를 가리킴)는 일물이라도 제 안존할 곳을 잃음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들이 해독 입는 것을 가련히 생각하여 번번이 사자를 보내어 화친할 것을 타일렀다. 그러나 백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자세의 험함과 거리의 요원함을 믿고서 천조의 크나큰 경륜을 모멸함으로, 황제는 이에 크게 노하여 삼가 시달린 백성들을 찾아 위로하고 죄지은 자들을 토벌하는 일을 행했나니 깃발이 향하는 곳마다 한 번 싸워 크게 평정했다.
진실로 그 궁궐을 없애 연못으로 바꿔 버리기까지 해서라도 장차 올 후예들에게 경계가 되게 해주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뽑아 버려서라도 그 후손들에게 교훈을 남겨 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유순한 자는 포용하고 반역한 자만 쳐 없앰은 선왕들이 남긴 훌륭한 전범이요, 망한 자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세손을 잇게 함은 옛 현철들이 세운 떳떳한 법이라, 일은 반드시 전적에 전해오는 옛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 백제 왕 사가정경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세워 그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고토를 보전케하노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이 되어 각각 지난날의 묵은 원한을 제거하고 우호를 맺어 서로 화친하며 공경히 소명을 받들어 길이 번방으로 복속할 일이다.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