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 통일과 김유신 장군> - 1/6
신라 제29대 태종대왕, 왕의 이름은 춘추, 성은 김씨로서 문흥대왕으로 추봉된 각간 용수(또는 ‘용춘’이라고도 함)의 아드님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따님인 천명부인이고, 왕의 비는 문명왕후 문희이니 바로 김유신공의 손아래 누이다.
왕이 문희를 맞아들이기 전의 일이다. 문희의 언니 보희는 어느 날 밤 서악에 올라가 방뇨를 했더니 온 서울에 오줌이 그득히 차오른 꿈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나 동생 문희에게 그 꿈을 얘기했더니 문희는 얘기를 듣고 나서
“내가 그 꿈을 사겠다.”
고 말해 왔다. 언니는,
“무엇을 주겠느냐?”
고 물었다.
“비단치마면 되겠지?”
라고 동생은 말했다. 언니는 좋다고 응낙했다. 문희는 언니 보희 쪽을 향해 옷깃을 벌리고 꿈을 받아들일 자세를 취했다. 보희는,
“지난밤의 꿈을 너에게 넘겨준다.”
고 외쳤다. 동생 문희는 비단치마로 꿈 값을 치렀다.
문희가 그 언니 보희에게서 꿈을 사고 난 뒤 열흘쯤 되는 정월 오기일(<삼국유사> 제1권의 ‘거문고 갑을 쏘아라.’ 조에 보이니 곧 최치원의 설이다. 즉 음력 정월 보름날을 가리킴)이다. 문희의 오라버니 유신은 바로 자기 집 앞에서 춘추와 함께 공차기(신라 사람들은 공차기를 가리켜 구슬 놀리기라고 했음)를 하고 놀았다. 유신은 짐짓 춘추의 옷을 밟아 그 옷고름을 떨어뜨려 놓고는 자기 집에 들어가 꿰매도록 하자고 청했다. 춘추는 유신의 청에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유신은 그 누이인 아해(보희)에게 춘추의 옷고름을 꿰매 주라고 말했다. 아해는,
“어찌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가벼이 귀공자를 가까이 하겠는가?”
라고 하면서 사양했다(고본에는 보희가 병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되어 있음).
그러자 유신은 아지(문희)를 시켜 춘추의 옷고름을 달아 주게 했다. 춘추는 유신의 그 의도를 알아채고 마침내 문희와 상관했다. 그 뒤로 춘추는 번번이 문희에게 다녀가곤 했다. 유신은 문희가 임신했음을 알았다.
“네가 부모님께 아뢰지도 않고 잉태한 건 어쩐 일이냐?”
고 문희를 책망하고는 널리 소문을 퍼뜨리고,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했다.
어느 날, 당시의 임금 선덕여왕이 남산으로 산책 나가는 것을 기다려 유신은 자기 집 뜰에다 섶을 쌓아 놓고는 불을 질러 연기가 치솟게 했다. 남산에서 선덕여왕은 연기를 바라보고 웬 연기냐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은 들은 말대로,
“아마 유신이 그 누이를 불태우나 봅니다.”
고 아뢰었다. 왕은 까닭을 물었다.
“그 누이가 시집도 가지 않았는데 임신을 한 때문인가 합니다.”
라고 신하들은 아뢰었다. 왕은,
“그것이 누구의 소위냐?”
고 다시 물었다. 이대 역시 왕을 모셔 그 앞에 있던 춘추의 얼굴이 확 변했다. 왕은 자기의 이질 되는 춘추의 소위임을 알고 말했다.
“네가 한 짓이로구나. 빨리 가서 구해 내도록 해라.”
하고 일렀다. 춘추는 왕의 영을 받고 유신의 집으로 말을 달려 왕명임을 알리고 제지시켰다. 그 뒤 곧 드러내 놓고 혼례를 치렀다.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당 고종 5(654)년에 춘추는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8년, 고종 12(661)년에 붕어했다. 향년 59세, 애공사(지금의 경주시 효현리에 있었음) 동쪽에 장사지냈다. 거기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왕은 유신과 함께 심신을 다하여 삼한을 하나로 통합하여 사직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
태자 법민과 각간 인문과 각간 문왕과 각간 노저와 각간 지경과, 그리고 각간 개원들은 모두 문희 부인의 소생으로 그때 언니 보희에게서 꿈을 샀던 결과가 여기에 나타났다. 서출로는 갑간(신라 광등 제9위인 급벌찬의 별칭) 개지문과 영공(국상에 대한 존칭) 차득과 아간(신라 관등 제6위인 이찬의 별칭) 마득과, 그리고 딸을 아울러 다섯 사람이었다.
왕의 식사는 한 끼에 쌀 서 말과 장끼 아홉 마리씩 먹다가, 백제를 멸한 뒤로는 점심을 그만두고 조석만을 들었다. 그러나 따져 보면 하루에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씩이었다. 왕이 치세하던 때 도성 안의 물가는 베 한 필이면 벼가 30석 또는 50석이나 되어 백성들은 모두 성대라고 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