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왕의 예지(豫知) 세 가지>
제37대 덕만의 시호는 선덕여대왕, 성은 김씨, 진평왕의 따님으로 부왕을 이이 당 태종 6년에 즉위했다. 이 여황은 나라를 다스리는 15년 동안에 세 번 앞일을 예지한 것 세 가지가 있다.
당나라 태종이 홍색, 자색, 백색, 이 삼 색의 모란꽃을 그린 그림과 그 씨앗 석 되를 보내 왔다. 선덕여왕은 모란꽃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씨앗을 궁전 뜰에 심어 보게 했다. 꽃이 피어서 지기까지 과연 향기라곤 없어 선덕여왕의 그 예언은 맞았다. 이것이 세 가지 예지인 것 중의 그 첫째다.
추운 겨울날이다. 영묘사(경주시 성진리에 있었다. 선덕왕 즉위 1(632)년에 창건, 찰간지주가 남아 있음)의 옥문지에는 난데없는 개구리 떼가 모여들어 3, 4일을 두고 울어댔다. 나라 사람들이 해괴한 일이라 생각하여 왕에게 물어보았다. 여왕은 옥문지에 개구리가 모여 울어 댄다는 얘기를 듣고서 급히 각간 알천과 필탄 등에게 명하여 날쌘 군사 2천 명을 뽑아 서울의 서쪽 교외로 달려가도록 했다. 가서 여근곡(지금도 경주에서 대구로 가는 도중 건산과 아화의 두 역 중간, 철로의 남쪽 편에 여근곡이 바라보인다. 부산의 일부로서 지형이 꼭 여자의 생식기 모양으로 생겨 ‘여근곡’이라 이름하게 된 것임)이란 골을 물어 찾아가 보면 거기에 틀림없이 적병이 잠복해 있을 테니 습격해 죽이도록 명령했다.
두 각간이 왕명을 받고서 각각 1천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달려가서 물어 보았더니 그곳 부산 기슭에 과연 여근곡이란 골이 있고, 거기에는 백제의 군사 500여 명이 참복해 있기에 모두 잡아 죽였다. 그리고 백제의 장군 우소란 자가 남산령 바위 위에 숨어 있는 것을 포위하여 사살하고 또 백제군의 후속 부대 1천 300여 명이 들이닥치는 걸 공격하여 한 사람 남김없이 죽였다. 이것이 선덕여왕의 그 세 가지 예지한 것 중의 둘째의 것이다.
그 셋째의 것으로는 왕이 아주 건강할 때인데 그 신하들을 보고서 나는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게 되겠으니 장사를 도리천에서 지내라고 당부한 것이다. 신하들은 그 도리천이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없어 왕에게 물어 보았더니 왕은 그 것이 낭산의 남쪽 비탈이라고 했다. 왕이 예언했던 그날이 되자 왕은 과여 주었다. 신하들은 왕의 당부에 따라 서울의 남쪽 근교에 있는 낭산의 남쪽 비탈에 장사지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문무대왕은 선덕여왕의 능 아래에다 사천왕사(지금도 경주시 배반리에 그 터가 남아 있음)를 창건했다. 불경에서 사천왕천은 수미산(불교의 세계 구성설에 나오는 산. 섬부주, 승신주, 우화주, 구로주의 4대주의 중앙 금륜 위에 높이 솟은 산으로, 그 꼭대기에 도리천, 중턱에 사천왕천이 있다고 함)의 중턱에 있고 그 위에 바로 도리천이 있다고 한 말을 상기하고서 그제사 선덕여왕의 성영함을 알았다.
선덕여왕이 생존해 있을 때 신하들이 모란꽃과 개구리에 관한 예언을 두고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 수 있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왕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꽃을 그린 그림에 나비가 함께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으로써 그 꽃의 향기 없음을 알았다. 그것은 곧 당나라의 임금이 내가 여자로서 짝이 없이 독신으로 지내는 걸 풍자한 것이다. 그리고 개구리는 그 눈이 불거져 나와 성난 형상으로 생겨 있어 그것은 병사의 상징이다. 옥문이란 곧 여근(곧 여자의 생식기. 옥문 역시 여자 생식기의 별칭. 하나의 은어다. 여자는 음과 양 중 음에 속하고 그 빛깔은 백색이요, 백색은 방위에서는 서쪽이라는 선덕왕의 유추는 바로 음양오행가들의 이론이다. 이 선덕왕에 관한 기록의 학문적인 근거는 문제가 되지만, 그 즈음 신라의 이미 음양오행설이 전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음)이요, 여자는 음과 양 중에 음에 속하고, 그 빛깔은 흰 것이요, 흰 빛깔은 서쪽을 상징한다. 그래서 적의 병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고, 남근이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
이 설명을 듣고 뭇 신하들은 모두 그 성지에 감복했다. 당나라 임금이 세 가지 빛깔의 모란꽃을 보낸 것은 신라에 세 명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서 그렇게 한 것인가. 세 여왕은 바로 선덕, 진덕, 진성이다. 이로써 당나라 임금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하겠다.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창건한 일에 관해서는 <양지사전>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별기에는 이 선덕왕 연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했다.
<<삼국유사>> 제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