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 간택 이야기, 울릉도 정벌>
지철로왕은 신라 제22대 임금이다. 왕은 그 음경의 길이가 무려 한 자 다섯 치나 되어 왕후가 될 짝을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삼도에 사자들을 보내어 왕후가 될 짝을 구해 오도록 했다.
사자가 모량부에 있는 동로수 아래에 이르렀을 때 개두 마리가 크기가 북만큼이나 한 인분덩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는 으르렁대며 먹고 있었다. 사자는 그 인분덩이의 임자가 필경 거인일 테고 그것이 여자라면 지철로왕의 짝이 될 만하겠다고 생각하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있다가 모량부 상공의 딸이 그곳에서 빨래를 하다 수풀 속으로 들어가 눈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사자가 모량부 상공의 집을 찾아가 살펴보았더니 놀랍게도 그 딸은 신장이 일곱 자 다섯 치나 되는 거인이었다. 돌아가 왕에게 사실을 알렸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 모량부 상공의 딸을 궁중으로 맞아들여 왕후로 삼았다. 뭇 신하들은 왕의 경사를 축하했다.
아슬라주(지금의 명주, 즉 강릉을 가리킴)의 동쪽 바다 가운데 순풍을 만나 돛배로 이틀쯤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지금의 울릉도를 가리킴)라는 섬이 있었다.
그 섬의 둘레는 2만 6천 730보(길이의 하나치로, 1보는 1.82미터가 됨) 쯤 되었다. 섬 오랑캐들이 물과 떨어진 그 바닷물의 깊음을 믿고서 교만한 태도로 신라에 복속해 오지 않았다.
지철로왕은 이찬 박이종(박이종은 <삼국사기>에는 이사부, 또는 태종으로 되어 있고 성은 김씨라했다. ‘이찬’은 그의 관직명임)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 토벌하게 했다. 이종은 여러 마리의 나무 사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가 오랑캐들에게,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보내겠다.”
고 시위했더니 그들은 두려워하며 마침내 항복해 왔다. 왕은 이종을 포상하여 아슬라주의 지사로 삼았다.
지철로왕은 성이 김씨, 이름은 지대로, 또는 지도로라고 했다. 시호(제왕이나 경상 또는 유현들의 생전의 공적을 청송하여 죽은 뒤에 바치는 청호)를 ‘지증’이라 했는데, 신라에서 시호를 바치기는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왕을 가리켜 ‘마립간’이라 한 것도 이 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남제의 황제 2(500)년에 즉위했다.
<<삼국유사>> 제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