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신(前身)과 호국신의 가호>
김유신은 이간(신라 관등의 제2위인 이찬의 별칭) 무력의 손자이자 각간 서현의 장자다. 그의 아우는 흠순이요. 손윗누이는 보희, 손아랫누이는 문희다. 보희의 아명은 아해였고 문희의 아명은 아지였다.
유신공은 진평왕 17(595)년에 태어났다. 그는 칠요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으므로 등에는 칠성의 무늬가 박혀 있었고, 그 밖에도 그에게는 신기한 것이 많았다.
18세 검술에 통하여 국선(곧 화랑이다. 엄밀히 말해 화랑 및 그 낭도의 총지휘자임)이 되었다. 당시 백석이란 자가 있어 어디서 왔는지 그 근본은 알 수 없었으나, 유신의 낭도에 속하여 여러 해 있었다. 유신랑은 그때 한창 고구려와 백제의 공벌 문제를 두고 밤낮으로 깊이 궁리를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백석이 그 계획을 알아차리고서 유신랑에게 제의해 오기를,
“공이 저와 함께 저쪽 적국에 잠입해 들어가 먼저 저들의 내정을 탐지하고 나서 일을 꾀하는 것이 어떻소.”
라고 했다. 유신도 그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백석을 데리고 밤을 타서 적국을 향해 출발했다.
어느 고개를 넘다 잠깐 쉬고 있는데 어떤 두 여인이 유신랑 일행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날 밤 골화천(지금의 영천)에 이르러 유숙하는데 또 한 여인이 홀연히 출현했다. 유신은 세 여인과 함께 한바탕 즐겁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 여인들은 맛좋은 과일을 유신랑에게 바쳤다. 유신랑은 과일을 받아먹고, 서로 마음이 허락되어 통심 정하기에 이르자 여인들은 유신에게 말했다.
“공이 말씀하신 바는 아미 알고 있습니다만, 공이 잠깐 저 백석이란 자를 떼쳐 두고 같이 수풀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속내를 펴오리다.”
유신랑은 여인들과 함께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수풀 속에 들어가자 여인들은 별안간 신령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나타나 유신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나림, 혈례, 골화(나림은 지금 경주의 낭산, 혈례는 청도의 오리산, 골화는 영천의 금강산임) 등 세 곳의 호군신이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그대를 유인해 가는데도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따라가기에 우리가 그대를 만류하려고 여기에 온 것이다.”
말을 마치고 세 신령은 사라져 버렸다. 유신랑은 신령이 일러주는 이 말에 놀라 넘어졌다가 재배를 드리고는 숲을 나왔다. 골화관에 들어 유숙하면서 유신은 백석에게 말했다.
“지금 타국으로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어버리고 왔구나. 함께 집으로 되돌아가 문서를 가져오도록 하자.”
백석을 타일러 집으로 되돌아오자 유신은 백석을 결박해 놓고 사실을 문초했다. 백석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고본은 백제 사람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추남은 고구려 사람이고 남녀 성교를 거꾸로 행한 것도 보장왕의 일임)이다. 우리나라 대신들에게 나는 이런 얘기를 들었다. 즉 신라 김유신의 전신은 우리 고구려국의 복술가이었던 추남(고본에는 ‘춘남’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도 잘못임)이다. 한번은 국경에 물이 역류하는 일이 있었다. 왕은 그에게 점을 쳐보게 했다. 추남은 점괘를 뽑아보고 대왕의 부인이 남녀간의 성교를 거꾸로 행하기 때문에 그 표정이 그와 같이 나타난 것이라고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은 놀라고 왕비는 대노하여 이것은 요괴스러운 여우의 말이라 하고 왕에게 고하여 추남을 다시 다른 일로 시험해보아 알아맞히지 못하면 죽여 버리도록 했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함 속에 감추고서 추남에게 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추남은 그 곳에 틀림없이 쥐가 들어 있고, 그 쥐는 여덟 마리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한 마리 쥐를 두고 여덟 마리라고 했으니 그것은 잘못 맞힌 것이라며 추남을 죽이기로 했다. 추남은 형장에 나아가 맹세했다. ‘내 죽은 두에 다른 나라의 대장으로 태어나 이 고구를 꼬 멸하고 말리라.’고. 추남의 목은 베어졌다. 함 속에 넣었던 쥐를 꺼내 배를 갈라 보았더니 그 속에는 새끼 일곱 마리가 들어 있었다. 이리하여 앞서 추남이 했던 답변이 맞았음을 알았다. 추남을 처형한 그날 밤 왕은 꿈을 꾸었다. 왕은 그 꿈에서 추남이 이곳 신라 서현공의 부인이 품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신하들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들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만, 과연 그 맹세대로 실현되나 보다고 하고, 나를 이곳에 보내어 추남의 복수심의 화신인 당신을 유인하는 계락을 쓰게 했던 것이다.”
유신은 백석을 형벌하고, 갖은 제물을 갖추어 그에게 계시를 주었던 세 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 신령들은 모두 현신하여 제사를 받았다.
김씨 집안의 재매부인이 죽자 청연 위의 골짜기에 장사지냈다. 이에 따라 그 골짜기를 ‘재매곡’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해마다 봄이 돌아오면 김씨 일문의 시녀들이 이 골짜기의 남쪽 시내에 모여 잔치를 벌이곤 했다. 그때가 되면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송림에 가득히 송화가루가 날아올랐다. 그래서 골짜기 어귀에 암자를 지어 이름을 ‘송화방’이라 하고 대대로 원찰을 삼았다.
제54대 경명왕(<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제42대 흥덕왕 10(835)년의 일로 되어 있음) 때에 이르러 유신공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했다. 유신공의 능은 서산 모지사 북쪽의 동편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
<<삼국유사>> 제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