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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포산이성(包山二聖), 포산에 살고 있는 두 명의 성사, 삼국유사,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관기와 도성, 두 성사가 신라에 있었다. 그들이 어떤 분들이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속세를 떠나 함께 포산(경상북도 현풍에 있는 비슬산)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관기는 남쪽 마루에 암자를 짓고, 도성은 북쪽 굴에 거처했다. 서로 10리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구름길을 헤치고 달밤이면 노래하면서 왕래하곤 했다. 도성은 관기를 부르고 싶으면 산속의 나무들이 화합하여 일제히 남으로 머리를 숙이며 맞아들이는 시늉을 지었고, 관기는 그것을 보고 도성에게로 갔으며, 관기가 도성을 부르고 싶으면 역시 나무들이 그와 같이 북쪽으로 머리를 숙이고, 그리하여 도성이 또 관기에게로 가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세월을 몇 해, 그가 거주하고 있던 뒷산의 높은 암벽 위에 도성은 언제나 좌선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벼랑 사이.. 더보기
신충괘관(信忠掛冠), 효성왕과 신충, 삼국유사,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효성왕이 아직 등극하기 전, 현량한 선비 신충과 함께 대궐 뜰에 있는 잣나무 아래에서 곧잘 바둑을 두곤 했다. 어느 날 신충에게 말했다. “후일 등극하는 날에 내가 만일 그대를 잊는다면 이 잣나무와 같으리라.” 신충은 일어나 배사했다. 두어 달 뒤에 효성왕은 즉위했다. 그리고 공신들에게 상작을 내렸다. 그런데 왕은 신충을 잊어버리고 상작의 대상에서 빠뜨렸다. 신충은 원망에 잠겨 시가(신충이 지은 시가는 ‘원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를 지어 잣나무에다 붙였다. ‘뜰의 잣이 가을에 안 이울어지매 너를 어찌 잊을꼬’ 하시던 우러러보던 얼굴이 계시온데,달그림자가 옛 못의 가는 물결 원망하듯이얼굴이사 바라보나, 누리도 싫은지고! 이 시가를 잣나무에 붙이자 싱싱하던 그 잣나무는 갑자기 누렇게 말라들었다. 왕은.. 더보기
연회도명(연회, 명예를 피하다), 문수점, 삼국유사,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고승 연회는 일찍이 영취산에 은거하여 매양 법화경을 읽으며 보현관행을 닦고 있었다. 뜰에 있는 연못에는 항상 연꽃 두어 송이가 피어 사철을 두고 시들지 않았다(지금 영취사 용장전이 연회의 구거임). 당시 국왕이었던 원성왕이 그 상서롭고 신기함을 듣고서 연회법사를 불러 국사로 받들려고 했다. 연회는 그 소식을 듣고서 암자를 버리고 둔적의 길을 떠났다. 서령의 바위를 넘어가노라니 한 늙은이가 밭을 갈고 있다가 연회사에게 어디를 가는 길이냐고 물어 왔다. “나라에서 소문을 함부로 듣고서 나를 벼슬로 얽매려 들기에 그것을 피해 가는 길이오.” 그 늙은이는 듣고 나서 말했다. “이 땅에선 법사가 지닌 가치를 팔 만도 한데 무얼 그리 수고롭게스리 멀리 가서 팔려고 하오? 법사야말로 매명을 진정으로 싫어하는 게 아니.. 더보기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지통사와 낭지사 이야기, 삼국유사,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2/2 - 2/2 원효가 찬술을 끝마쳐 문선이란 은사를 시켜 낭지법사에게 책을 받들어 보내면서 그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계송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서쪽 골짜기의 사미(반고사는 영취산의 서북쪽에 있기 때문에 ‘서쪽 골짜기의 사미’라 했으니 바로 원효 자신을 가리킴)는 머리를 조아려 예 드리옵나니동쪽 멧부리의 상덕 고암전에 미세한 먼지를 불어 영취산에 보태고(자기가 찬술한 ‘초장관문’ 및 ‘안신사심론’의 불계에 대한 이바지를 겸사투로 말한 것임)작다란 물방울을 날려 용연에 던지나이다. 영취산의 동쪽에 태화강이 있다. 바로 중국 태화지의 용을 위해 복을 비는 절을 그 언저리에 세운 바 있기 때문에 원효의 게송에서 그 강을 가리켜 ‘용연’이라고 한 것이다. 지통과 원효는 모두 대성들이다. 두 성인이 경의를 다하여.. 더보기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지통사와 낭지사 이야기, 삼국유사,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1/2 - 1/2 삽량주 아곡현(삽량은 지금의 양주요, 아곡의 ‘곡’은 한편 서‘자로 쓰이기도 했고, 또는 ’구불‘, ’굴불‘이라고도 했음. 지금 울주에 굴불역이 있으니 아직도 그 이름이 쓰이고 있음. 삽량, 즉 양주는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임)에 있는 영취산에는 한 신통한 승려가 살고 있었다. 그 승려가 암자를 짓고 그 산에서 살아온 지가 여러 해였으나 고을에선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 스님 또한 자신의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법화경>>을 강하고 있어 신통력이 있었다. 당 고종 12, 즉 문무왕 즉위 (661)년에 지통이란 사미가 있었는데 그는 본래 이량공의 집 종이었다. 승려가 되던 해 그의 나이 일곱 살, 그때에 한 까마귀가 그에게로 날아와 이렇게 짖었다. “영취산으로 가서 낭지의 제자가 되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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