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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삼국사기>에는 ‘박제상’으로 되어있음), 신라의 충신 김제상,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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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빛나는 충절> - 3/3

 

미해를 도주시킨 뒤 제상은 미해가 거처하던 방으로 들어가 있었다. 날이 훤히 박자 미해를 시종 들던 왜인들은 미해를 살피러 왔다. 그들이 방으로 들어오려 하자 제상은 나가 그들을 제지시키면서 말했다.

 

어제 사냥질로 좀 뛰어다니시더니 몹시 피곤하신가 보오. 그래 아직 기침을 못 하고 계시오.”

 

한낮이 지나 해가 기울 때가 되어도 미해가 잠자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시종들은 아무래도 수상쩍어 다시 와서 제상에게 물었다. 그때서야 제상은 태연히 대답했다.

 

미해공께서는 떠난 지가 이미 오랠세.”

 

시종들은 깜짝 놀라 왜 왕에게 달려가 고해 바쳤다. 왜 왕은 기마병들을 시켜 미해를 뒤밟아 쫓게 했다. 그러나 끝내 미해를 붙잡지 못했다. 그러자 왜 왕은 제상을 가두어 놓고 물었다.

 

너는 어째서 너희 나라 왕자를 빼 보냈는가?”

 

제상은 대답했다.

 

나는 신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는 아니다. 이제 내 나라 임금님의 뜻을 이루려 했을 뿐인데 내 구태여 그대에게 무었을 말하랴.”

 

왜 왕은 노기 띤 얼굴로 말했다.

 

네 이미 나의 신하가 된 마당에 신라의 신하라고? ‘신라의 신하노라 굳이 주장해 보라. 오형을 갖추어 다스려 주겠다. 그러나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내 반드시 후한 작록을 내릴 것이다.”

 

왜 왕의 말을 제상은 받아넘겼다.

 

내 차라리 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너희 왜국의 신하는 되고 싶지 않다. 차라리 신라의 매질은 받을지언정 너희 왜국의 작록은 내 받고 싶지 않다.”

 

왜 왕은 서슬이 등등해졌다. 형관을 시켜 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겨 내게 하고, 갈대를 베어 낸 뒤의 그 날카로운 끄트머리 위로 제상을 걷게 했다(지금도 갈대 끝에 혈흔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그것을 제상의 피라고 말하고 있음). 그리고는 제상을 향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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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제상은 답변했다.

 

신라의 신하다.”

 

왜 왕은 이번에는 철판을 달구어 제상으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서게 하고 물어 보았다.

 

어느 나라의 신하인가?”

 

제상은 답변했다.

 

신라의 신하다.”

 

왜 왕은 드디어 제상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에서 불태워 죽였다.

 

한편 미해는 신라 해안에 상륙하여 먼저 강구려를 보내어 자기의 환국을 궁중에 알렸다. 눌지왕은 놀랍고 기뻤다.

 

궁중의 모든 관리들에 명하여 굴헐역(지금의 울산 근처인 듯함)에 나아가 미해를 맞게 하고, 왕 자신도 보해와 함께 남쪽 교외에 나가 맞아들였다. 대궐로 돌아와 연회를 베풀고, 그리고 신라 안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는 한편 제상의 아내에게는 국대부인의 작위를 내리고 그이 딸 중 한 사람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맞았다.

 

제상의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곧잘 옛 주가의 일에 견주어 말한다. 주가는 한나라 유방의 신하였다. 그는 영양 땅에서 초나라 군사들의 포로가 되었다. 초나라 왕 항우는 주가에게 말했다.

 

네가 나의 신하가 되기만 하면 만록후로 삼겠다.”고 했으나 주가는 오히려 항우를 꾸짖고 끝내 굽히지 않아 항우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는데, 제상의 충렬은 이 주가에 비해 조금도 못지않다고들 했다.

 

앞서 제상이 왜국으로 떠날 때 부인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뒤쫓아 갔으나 끝내 그 남편 제상을 따라잡지 못한채 망덕사(지금의 경주시 배반리에 있었던 절로서 신문왕 증위 5(685)년에 창건, 물론 이 절은 어느 지점을 표시하기 위한 편의로 이끌어 온 것이고 제상 당시에는 아직 절이 있었음) 절문 남쪽에 모래벌판에 나가 누어 길게 울부짖었다. 그래서 그 모래벌판을 이름하여 장사라고 했다. 친척 두 사람이 겨우 그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펄썩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일어나려 들지 않았다. 부인이 다리를 뻗고 주저앉아 버린 곳, 그곳을 벌지지라 이름했다.

 

오랜 뒤에도 부인은 그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를 길 없어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 고개 위에 올라가 바다 건너 아득히 왜국을 바라보며 힘이 진하도록 통곡하다 그대로 죽어갔다. 죽어서 부인은 치술신모가 되었다 현재 사당이 남아 있다.

 

- 끝 -

 

<<삼국유사>>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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