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의 한 전형> -1/2
제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죽지’는 ‘죽만’ 또는 ‘지관’ 이라고도 함)이 거느리는 낭도 가운데 득오급간(‘곡’이라고도 한다. ‘득오’는 ‘득오곡‘ 또는 ‘득오실’이라고도 하는데, ‘실’은 골짜기, 고을의 뜻을 지닌 우리 고어 ‘실’의 음차자. ‘곡’은 물로 ‘실’의 훈차자이다. 따라서 ‘곡’과 ‘실’은 마찬가지 말이다. 실은 지금도 지명에 많이 쓰이고 있다. ‘급간’은 신라 관등 제 9위)이란 한 낭도가 있어 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는 날마다 충실하게 출근하더니 한번은 열흘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죽지랑은 득오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가 있는가를 물어 보았다. 그 어머니의 말이,
“당전(신라의 군직위, 즉 부대장임)인 모량부의 익선 아간(신라 관등의 제6위)이 내 아들을 부산성의 창고기지로 임명했으므로 급히 달려가느라 낭에게 하직을 고할 틈이 없었노라.”
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죽지랑은 당신의 아들이 만약 사사로운 일로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으나 공변된 일로 갔다니 마땅히 찾아가 대접해야 한다고 말하고는 설명 한 합과 술 한 항아리를 좌인(우리말로 ‘개질지’라 하는데, 노복을 말한다. ‘개질지’는 ‘갣지’ 또는 ‘갇지’의 차자)들에게 들려 득오를 찾아 나섰다. 낭도 137명도 역시 의장을 갖추고 그를 시종했다.
죽지랑 일행은 부산성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득오실이 어디에 있는가 물어 보았다. 문지기는 득오가 지금 익선의 밭에 가서 예에 따라 노역에 종사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죽지랑은 익선의 밭으로 가서 득오를 만나 가져온 술과 떡으로 그를 먹였다. 그리고는 익선더러 득오에게 휴가를 주어 자기와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익선은 죽지랑의 소청을 굳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때 간진이란 사리(수송 및 연결 등의 임무를 띤 관리)가 추화군(수송 및 연결 등의 임무를 띤 관리) 능절의 벼 30석을 거두어 성중으로 수송해 가다가 이 일을 알았다. 간진은 죽지랑의 선비를 중히 여기는 뭄격을 내심 찬미하는 한편, 익선의 그 사람됨이 어둡고 막힌 것을 더럽게 여겼다. 이에 그는 가지고 가던 30석의 벼를 익선에게 주고서 곁들여 죽지랑의 청을 도왔다. 그래도 익선을 허락하지 않았다. 간직은 다시 지절 사지(신라 관등의 제13위)의 말과 안장을 주었다. 그제야 익선은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화랑 단체를 관장하던 관직)가 이 사실을 듣고서 사자를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러움을 씻어 주려 했다. 그러나 익선이 달아나 종적을 감춰 버리자 그 맏아들을 잡아갔다. 때는 바로 11월, 극심하게 추운 날이다. 익선의 맏아들을 성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얼어 죽었다.
효소왕이 익선의 일을 듣고서 명령을 내려 모량리 사람으로서 관직에 종사하는 자들을 모두 몰아내어 다시 관공서에 몸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중이 되는 것도 금하여, 만약 중이 된다 해도 절에는 어울려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한편 간진의 자손은 평정호손(당제에 한 마을의 통활하는 호를 평정호라 했음)으로 삼아 표창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원측법사는 해동의 고승이었음에도 그가 모량리 사람이란 이유로 하여 승직을 얻지 못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