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와 역신(疫神), 그리고 신라의 쇠운>
제49대 헌강왕 때에 신라는 서울을 비롯하여 시골에 이르기까지 즐비한 주택과 담장이 잇달아 있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거리에는 항상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철 기후는 순조롭기만 했다.
이렇게 나라 안이 두루 태평의 극을 누리자 왕은 어느 한때를 타서 신하들을 데리고 개운포(학성 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 현재의 울산시)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다. 놀이를 마치고 서울로 행차를 돌리는 길에 왕 일행은 잠시 물가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바다에서 구름이랑 안개가 자욱이 끼어 덮여 오면서 훤하던 대낮이 컴컴하게 어두워지고 행차가 나아갈 길조차 어둠 속으로 흐려 들어갔다.
이 갑작스런 변괴에 놀라 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어 보았다. 일관이 있다가 왕의 물음에 답했다.
“이것은 동해의 용이 부린 조화입니다. 뭔가 좋은 일을 베푸시어 풀어 주어야겠습니다.”
이에 왕은 당해 관원에게 명하여 동해의 용을 위해 그 근경에다 절을 지어 주게 했다. 왕의 그러한 명령이 내려지자 구름이 사라지고 안개가 걷혔다. 그래서 왕 일행이 머물던 그곳을 ‘개운포’라 이름 지었다.
자기를 위해 절을 세우기로 한 결정에 동해의 용은 유쾌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노래했다.
동해용의 그 일곱 아들 중의 한 아들이 왕의 행차를 따라 서울에 들어와 왕의 정사를 보좌했다. 이름을 ‘처용(’처용‘이라는 이름에 대한 양주동의 설을 인용한다. <동국세시기> 처용이라는 말을 뜻을 ’추령‘에 의했고, 이 밖에 ’초용‘이로써 이를 설명하는 경우가 있으나 어느 것이든 다 한자를 억지로 끼어 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형 또는 가면이 생기기 전에 이미 처용이란 인물이 생존했던 것으로 보아 알수 있다. 처용은 반드시 한자의가 아닌 ’제융 또는 치융‘이란 말에서 그 원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이라 했다. 왕은 미녀 한 사람을 그의 아내로 짝지어 주었다. 그것은 그가 동해도 되돌아가지 않도록 마음을 잡아 두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또 그에게 급간의 지위를 내려 주었다.
처용의 아내는 무척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처용의 아내를 역신(마마를 맡았다는 신. 곧 역병 따위의 재앙을 끼치는 귀신)이 사랑했다. 역신은 사람으로 화하여 밤중에 처용의 집으로 그녀를 찾아왔다. 그때 처용은 집에 없었다. 역신은 처용의 아내와 함께 몰래 잠자리에 들었다. 처용이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자기 아내 혼자만이 있어야 할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이었다. 처용은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처용이 지어 부른 노래(‘처용가’로 통용되고 있음)는 이러했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드리 노닐다가
들어가 자리 보니 다리가 네히어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 해인고
본대 내 해다마는 앗아날 어찌하릿고
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처용이 물러나자, 그 역신은 현형하여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해 오다가 오늘 밤 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공은 성난 기색 하나 나타내지 않으시니 참으로 감복하고 탄미했습니다. 맹세합니다만 이 뒤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화상만 보여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것을 연유로 하여 나라 사람들은 문간에다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붙여 사귀를 물리치고 경복을 맞아들이게 했다.
헌강왕은 개운포에서 돌아 곧 영취산 동쪽 산록에다 좋은 터를 잡아 절을 세웠다. 이름을 ‘망해사’(경상남도 울주군 청량면 울리에 있었음)라고 했다. 또는 ‘신방사’라고 하기도 했는데 바로 그 동행의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헌강왕은 또 포석정에 거둥했다. 그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어전에서 춤을 추었다. 좌우의 신하들에게는 보이질 않고 오직 왕에게만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왕은 남산 신의 그 춤을 본떠서 몸소 추어 그 춤이 어떤 모양의 것이었던가를 보여 주었다.
어전에 나타난 춤을 춘 그 신의 이름은 ‘상심’이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고도 하고 있다.
어떤 설에는 신이 나와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피어 형상을 잡아서는 장인에게 명하여 부각시켜 후세에 보여 주었기 때문에 그 춤을 가리켜 ‘상심’이라 한다고 했다. 또는 ‘상염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곧 그 귀신의 모양으로 하여 일컬어진 것이다.
왕이 또 금강령에 거둥했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 춤의 명칭을 ‘옥도검‘이라 했다. 또 동례전에서의 연회 때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다. 춤의 명칭을 ’지백급간‘이라 했다.
<어법집>에는 그때 산신이 즐겁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라고 했는데, 그것은 대체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시리던 사람들이 미리 알아채고 많이들 도피해 감으로 하여, 도읍이 앞으로 깨뜨려질 것임을 말한 것이라고 했다.
즉, 지신이랑 산신은 나라가 장차 망해 갈 것을 알았으므로 그 기리를 춤을 추어 경고해 주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그 기미를 깨닫지 못하고는 오히려 상서를 나타낸 것이라 하여 환락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리하여 나라는 끝내 망하고 말았다.
<<삼국유사>> 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