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이야기> - 2/2
온조는 하남 위례성(지금의 직산. 하남 위례가 직산이라는 설은 일찍이 그릇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남 위례는 현재의 광주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서 그 열 사람의 신하들을 그의 보익으로 하여 군호를 ‘십제’라 했다. 그것은 한나라 성제 15(기원전 18)년의 일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짰기 때문에 안거할 수가 없어 되돌아왔다. 돌아와, 바야흐로 위례에 도읍이 자리 잡히고 인민들이 편안히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마침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죽고 말았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백성들이 즐거워했다고 해서 그 뒤 국호를 ‘백제’(국호인 백제는 그 이전 백제의 명칭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여기 ‘백성들이…….’ 운운한 한자에 구애된 부회일 것임)로 고쳤다. 백제의 세계는 고구려와 함께 다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씨’(성의 지계로 자손들의 나온 곳을 구별하는 것임)를 ‘해’라고 했다.
뒤에 성왕 연대에 이르러 도읍을 사비에 옮기니 지금의 부여군이다.
옛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명왕의 셋째 왕자 온조는 전한 성제 15년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으로 가서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온조 14(기원전5)년에는 도읍을 한산(지금의 광주를 가리킴)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389년을 지냈다.
제13대 근초고왕때, 동진의 간문제 원년, 즉 왕 즉위 26(371)년에는 고구려의 남평양(지금의 서울을 말함)을 점령했다. 그리고 도읍을 북한성(지금의 양주를 말함)으로 옮겼다. 여기서 105년을 지냈다.
제22대 문주왕 즉위(475)년에 도읍을 웅천(지금의 공주를 말함)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63년을 지냈다. 제26대 성왕 연대에 이르러선 소부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 제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그곳에서 지냈다.
당 고종 11년, 즉 의자왕 재위20(660)년에 신라의 김유신과 소정방이 백제를 토평했다.
백제국에는 본래 5부가 있어 37군, 200여 성, 76만 호를 나누어 통치해 왔었다. 당은 그 땅에다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의 다석 도독부를 설치하고, 추장으로 도독부 자사를 삼았다. 얼마 있지 않아서 신라는 그 땅을 모두 병합한 뒤, 웅천, 전주, 무주의 세 주와 그 밖에 여려 군현을 두었다.
백제의 호암사(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에 그 터가 있음)에는 정사암(속칭 천정대라고 함)이 있었다. 국가에서 재상을 선임하려 할 때에는 선임에 당할 만한 사람 3, 4명의 이름을 함 속에 적어 넣고는, 그것을 봉하여 바위 위에 두었다가 잠깐 뒤에 개봉해 보고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국이 있는 사람으로 재상을 삼아 왔다. 그래서 그 바위를 ‘정사암’이라고 한 것이다.
또 사비수 가에 한 바위가 있어 소정방이 일찍이 이 바위 위에 앉아 어룡을 낚아 냈다. 그래서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은 자취가 있고, 따라서 ‘용암’(조용대를 말함)이라 이름했다.
부여군 안에 세 산이 있어, 일산, 오산, 부산(오산은 지금 부여읍의 오산이 그것이고, 부산은 부여읍 북쪽에 있었으며 옛 이름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일산은 알 수 없음)이라고 했다. 백제가 전성할 때에는 그 세 산위에는 각각 신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날아다녀 서로의 왕래가 조석으로 끊이지 않았다.
또 사비수 언덕에는 10여 인이 앉을 만한 바위 하나가 있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 차 거둥할 때 먼저 이 바위에서 부처에게 망배했더니 그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 그래서 그 바위를 ‘돌석’(지금 부여읍 서쪽에 있는 이른바 지온대가 바로 그것임)이라 이름 지었다.
사비수 양안에는 그림병풍 같은 곳이 있었다. 백제의 왕들은 매양 그곳에서 연회를 열고서 노래하고 춤추며 놀았다. 그래서 지금도 그곳을 ‘대왕포’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시조 온조는 바로 동명왕의 셋째 왕자로서, 그는 체대가 큼직하고 성품이 효우스러웠으며 말타기 활쏘기를 잘했다. 다루왕은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사비왕(사이왕이라고도 함)은 구수왕이 붕어하자 왕위를 계승했는데 아직 어려서 정사를 처리해 나갈 수 없었다. 곧 사비왕을 폐하고 고이왕을 세웠다. 일설에는 위명제 13(239)년에 사비왕이 붕어하자 고이왕이 섰다고도 한다.
- 끝 -
<<삼국유사>> 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