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아도는 ‘아도’ 또는 ‘아두’라고도 함)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 - 2/3
왕 즉위 3년, 그때 성국공주가 병이 들었다. 무의(고대 무당의 일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가 인간의 질병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무당이 곧 의사였음)는 누구도 그 병을 고치지 못했다. 왕은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공주의 병을 낳게 할 의원을 찾아오도록 했다. 이때 아도사가 문득 대궐로 들어가 그 병을 치유시켰다. 미추왕은 크게 기뻐하여 아도에게 소원을 물었다. 아도사는 왕께 소원을 말했다.
“저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다만 천경림에다 불사를 세우고 크게 불교를 일으켜 이 나라를 복되게 빌고 싶을 뿐입니다.”
왕은 기꺼이 허락하고 공사를 시작하도록 명했다. 당시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집을 덮었다. 아도는 여기서 머물면서 교법을 강설했다. 그러노라면 때때로 천화가 떨어지곤 했다. 절 이름은 ‘흥륜사’라 했다.
모록의 누이동생 사씨가 아도사에게 투신하여 여승이 되어 삼천기에다 절을 세우고 거처로 삼았다. 그 절은 ‘영흥사’(지금의 경주시 황남리에 있었음)라 불렀다. 그 뒤 오래지 않아 미추왕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이 아도사를 해치려고 했다. 아도사는 모록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손수 무덤을 만들고, 그러고는 그 속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자절을 하고,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불교 역시 쇠퇴되어 갔다.
제23대 법흥왕, 양나라 무제 13(514)년에 왕이 즉위하고 나서부터는 불교가 흥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추왕 즉위 2(263)년, 즉 아도화상이 어머니 고도령의 지시를 받아 신라로 온 해로부터 252년째 되는 해의 일이다. 그래서 도령의 예언한 바 3천여 개월이란 말이 맞았던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를 놓고 보면 <신라본기>의 기록과 아도본비의 두 설은 이처럼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한번 살펴볼까 한다.
양과 당, 두 나라의 승전과 <삼국본사>에는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서의 불교의 시작이 동진 말기 효무제 연간이라 했으니 순도와 아도 두 법사가 소수림왕 즉위 4(374)년에 고구려에 온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두 기록은 잘못이 없다.
그런데 <신라본기>의 기록대로 만일 아도화상이 비처왕 때에 비로소 신라에 왔다면 이것은 아도가 고구려에서 100년이나 있다가 신라로 온 셈이 된다. 아무리 대성의 출몰이 보통사람과는 다르기로서니 반드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신라에서의 불교 신봉이 이토록 늦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아도본기>에서 전하는 바대로 아도가 신라로 온 것이 만일 미추왕 때의 일이라면 이것은 아도가 고구려에 온 소수림왕 4년보다 100여 년을 앞선 셈이 된다. 그 시대에는 신라에 아직 문물, 예교도 없었고, 국호도 정해지지 않고 있었는데 어떻게 아도가 와서 불교의 신봉을 청할 만한 계제가 되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도 오지 않은 채 신라로 건너뛰었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설령 미추왕 연대에 불교가 잠깐 흥기했다가 쇠퇴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 사이 교계의 소식이 그토록 적막할 수 있겠으며, 눌지왕대에 보내 온 그 향의 이름조차도 몰랐겠는가.
아도가 신라에서 온 연대가 한 가지는 어찌 그리 뒤지고, 한 가지는 어찌 그리 앞설까. 생각건대 불교 동점의 형세는 필경 고구려, 백제에 먼저 전파되고 나중에 신라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눌지 연대는 고구려의 소수림 연대에 가까우니만큼 아도가 고구려에서 신라로 온 것은 틀림없이 눌지왕대의 일일 것이다.
또 왕녀의 병을 치료했다는 것도 다 아도가 행한 일로 전하는 것을 보면 이른바 ‘묵호자’란 것도 본명이 아니고 하나의 별명일 것이다. 그것은 양나라 사람들이 달마(남인도 향지국 왕의 셋째 왕자로서 득도한 뒤 본국에서 교화를 펴다, 양나라 무제 19(520)년에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 선종의 초조가 된 것이다. 고산 소림사에서의 그의 9년 면벽은 유명함)를 가리켜 ‘벽안호’라 한 것이나, 진나라에서 석도안(진나라의 승려로 중국 불교의 개척자. 12세에 출가, 얼굴이 매우 못생긴 것으로 유명했으나 지혜는 총명했다. 사방의 구법자들이 다투어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으니 전진왕 부견은 그의 학덕을 흠모하여 군대로 그가 있는 양양을 포위, 장안으로 초청하여 경전을 번역, 강론하게 했을 정도다. ‘석’은 불승에게 공통되는 성으로, 그것은 교조 석가의 성을 따른 데서 온 것이자 이 ‘도안’의 주장에 의해 성립된 것임)을 조롱하여 ‘칠도인’이라 한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즉 아도가 하나의 모험을 행하면서 타인들의 꺼림을 피하느라 그 성명을 바로 대지 않았던 것 같다. 대개 당시 사람들이 그 들은 바에 따라 ‘묵호’, ‘아도’의 두 가지 이름을 두고서 별개의 두 사람으로 간주하여 전한 것이리라. 더욱이 아도의 생김새가 묵호자와 흡사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도 묵호자와 아도는 이름은 달라도 같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