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아도는 ‘아도’ 또는 ‘아두’라고도 함)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 - 1/3
<신라본기> 제4권에 있는 기록이다.
제 19대 눌지왕 때에 사문(사라마나, ‘식심’, ‘공로‘라 번역되며, 부지런히 모든 좋은 일을 닦고 나쁜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도나 외도를 불문하고 처자권속을 버리고 수도 생활을 하는 이를 총칭한다. 그러나 후세에는 오로지 불교에서의 출가, 수도하는 일을 가리키게 되었다. ’비구‘와 같은 뜻)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을 말함)에 들어왔다. 그 고을에 사는 사람 모례(’모륵‘이라고도 함)가 그를 맞아 자기 집에다 굴을 파고 안치시켰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의복류와 향을 전해 왔다(고득상의 영사시에는 양나라에서 원표란 시승을 시켜 명단, 불경, 불상 들을 보내 왔다고도 함). 그러나 신라의 군신들은 향의 이름도, 용도도 몰랐다.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온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물어 보게 했다. 묵호자가 그것을 보고 그건 향이라는 물건이며 그것을 불에 태우면 진한 향기를 풍긴다는 것과 어떤 신성한 존재에게 정성을 통하게 하는 데 쓰인다는 것, 그리고 그 신성한 존재란 삼보(불, 법, 승을 말함)에 불외한 것이고 그 향을 피워 발원하기만 하면 반드시 영검이 있다는 것 등을 말해 주었다(신라의 눌지왕대는 중국의 진송 시대에 해당하므로 양나라에서 사자를 보냈다는 것은 잘못인 듯함).
그 즈음 왕녀가 병이 들어 몹시 위독했다. 묵호자를 불러들여 향을 사르며 기도를 드리자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은 기뻐하며 후하게 예물을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묵호자는 신라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뒤 제21대 비처왕, 즉 소지왕 때다. 아도화상이란 자가 종자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일선국 모례의 집에 왔다. 그 생김새가 묵호자와 흡사했다. 수년을 머물러 있다가 그는 병을 앓지도 않고 운명했다. 그의 종자 세 사람은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불교의 경문과 율법을 강독했다. 가끔 신봉하는 사람이 있었다(주에서는 <아도본비> 및 모든 전기와는 다르다고 했다. 또 <고승전>에는 아도가 서축 사람이라 했고, 오나라에서 왔다고 했음).
<아도본비>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적혀 있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는 고도령으로, 위나라 제왕 연간(240~248)에 그 나라 사람 아굴마(‘아’는 성임)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던 길에 고도령을 사통하고 돌아갔다. 이리하여 태어난 아이가 아도이다.
아도가 5세 되던 때 어머니는 아도로 하여금 출가하게 했다. 나이 16세 때 아도는 위나라로 가서 그의 아버지 굴마를 찾아뵙고, 현창화상의 문하에 들어가 수도했다. 19세 때에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왔다. 어머니 고도령은 아도에게 이렇게 일러 주었다.
“이 나라는 아직까지 불법을 모르고 있으나 이후 3천여 개월이 지나면 신라에 한 거룩한 임금이 출현하여 크게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그 서울 안에 일곱 군데의 옛 절터가 있다. 그 첫째가 금교 동쪽의 천경(지금의 흥륜사. 금교는 서천교를 말하는 것으로, 세속에서는 ‘송교’라고 잘못 부르고 있다. 이 절은 아도가 처음으로 기초 잡은 것으로 중간에 폐지되었다. 법흥왕 정미년에 시작하여 을묘년에 크게 역사를 벌여 진흥왕 때에 낙성되었다. 정미년은 곧 법흥왕 14(527)년, 을묘년은 법흥왕 즉위 22(535)년임), 둘째가 삼천기(지금의 영흥사), 셋째가 용궁 남쪽(지금의 황룡사. 진흥왕 계유년에 개창했다. 계유년은 진흥왕 즉위 14(553)년임), 넷째가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 선덕왕 갑오년에 개창했다. 갑오년은 선덕왕 즉위 3(634)년임), 다섯째가 사천미(지금의 영묘사. 선덕왕 을미년에 개창했다. 을미년은 선덕왕 즉위 4(635)년임), 여섯째가 신유림(지금의 사천왕사. 문무왕 을묘년에 개창했다. 을묘년은 문무왕 즉위 19(679)년임), 그리고 일곱째가 서청전(지금의 담엄사)이다. 이곳들은 다 전세상 부처 때의 절터로서 법수가 길이 흐르던 곳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 선양하면 석사(불교의 사전)가 동방으로 향해 오리라.”
아도는 어머니의 지시를 받고 신라로 왔다. 왕성의 서쪽 마을에 몸을 붙이고 있었으니 곧 지금의 엄장사이고, 때는 미추왕 즉위 2(263)년이었다. 아도는 대궐에 들어가 교법의 전파를 청했다. 그러나 세상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꺼리고 심지어 아도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아도는 속림(지금의 중국 일선현) 땅 모록(‘녹’자는 ‘예’자와 자형이 비슷한 데서 생긴 와전일 것이다. <고기>에 의하면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으로 오자 그때 천지가 진동했고, 사람들은 그 승명을 아지 못하고 ‘삼마’라고 불렀다. ‘삼마’란 곧 ‘승’을 일컫는 말로, ‘사미’라고 말하는 것과 같음)의 집으로 도망가 숨어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