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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 신라 불교의 기초, 묵호, 아도, 담시 이야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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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아도는 ‘아도’ 또는 ‘아두’라고도 함) 신라 불교의 기초를 닦다> - 3/3

 

아도의 어머니 고도령이 신라 서울 안 일곱 군데의 절터를 차례로 든 것은 곧 그 개창의 선후를 예언한 것이나, 두 기록이 잘못 됨으로써 사천미의 절터를 다섯째에다 놓은 것이다. 그리고 ‘3천여 개월이란 것도 꼭 그대로 믿을 것은 못된다. 눌지왕대의 법흥왕 14(527)(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의 연대임) 까지는 100여 년이 되는데 만일 1천여 개월이라면 거의 닿는다. 성을 라 하고 이름을 외글자인 로 한 것은 잘못인 것 같으나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음은 북위의 승려 담시(일명 혜시라고도 함)의 전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담시는 관중(장안을 말함) 사람으로서 출가한 뒤에 이적이 많았다. 동진 효무제 12(384)년 말에 경, ,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에 가서 교화를 펴 삼승(성문, 연각, 보살에 대한 세 가지 교법. ‘은 물건을 실어 옮긴다는 뜻인데, 부처님의 교법도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것이므로 이에 비유됨)을 교수하며 그 즉석에서 불계에 귀의 시켰다. 대체로 이것이 고구려가 불교에 접한 시초이다.

 

동진 안제 9(405)년 경에 담시는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서 그 부근 일대를 개도했다. 담시는 그 발이 얼굴보다 더 희고 아무리 흙탕물 속을 다녀도 발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어,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백족화상이라 불렀다고 한다. 진나라 말기에 북방의 흉노인 혁련발발(516국의 하나인 하나라의 세조 무렬제)이 관중을 격파하고 사람을 무수히 죽였다. 그때 담시도 역시 화를 만나기는 했으나 칼에 맞아도 도무지 죽지를 않았다. 발발은 감탄하고는 널리 승려들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를 않았다. 담시는 그러자 산수간에 숨어 두타행(두타는 수치, 세완, 기제 등으로 번역된다. 곧 번뇌의 티끌을 떨어 없애고 의, , 죽에 탐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를 수행하는 것으로, 이 두타의 행하는 법에 12종이 있으나 두타행이라면 그 가운데 흔히 걸식하는 행만을 의하는 경우가 많음)을 닦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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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발도(북조 북위의 태무제)가 다시 장안을 점령하고 위세를 떨쳤다. 그때 박릉에 최호란 자가 있어 이단의 도(여기서 이단의 도란 곧 도교를 일컫는 말)를 조금 습득하여 불교를 질시했다. 최호가 척발도의 재상이 되어 그의 신임을 받자 천사(도교 교주의 칭호)인 구겸지와 함께 척발도에게 불교는 무익하고 민생을 해치는 것이라 하여 불교를 탄압하도록 권유했다.

 

대평(북위의 태무제, 곧 척발도의 연호 대평진군의 약칭이다. 그 말년은 서기 450년경임) 말 년경, 담시는 바야흐로 척발도를 감화시킬 때가 온 것을 알고 원회일에 문득 석장(승려가 되는 지팡이. 지팡이의 윗부분이 주석으로 만들어지고 한 개의 큰 고리에 여섯 개의 작은 고리가 꿰어져 있어 움직이면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육환장이라 부름)을 짚고 궁궐 문 앞에 이르렀다. 척발도는 담시가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거듭 칼로 찔렀으나 담시는 조금도 상처가 나지 않았다. 척발도가 손수 칼로 내리쳤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북원에 기르고 있는 사나운 호랑이 앞에 던져 보았다. 호랑이 역시 담시에게 접근해 오지 못했다.

 

마침내 척발도는 창피스럽기도 하고 담시가 두렵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지독한 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역시 악질에 걸렸다. 척발도는 그 죄과가 최호와 구겸지 때문이라 하여 두 사람과 그 집안을 멸족시키고 나라에 선포하여 불교를 크게 신장했다. 담시의 그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이상 담시의 전기를 두고 언급해 보면 담시는 동진 효무제 말(396)년경에 동방에 와서 안제9(405)년경에 관중으로 되돌아갔다면, 담시가 10여 년을 이 땅에 머문 셈이 되는데 이곳 동방의 역사에는 그 기록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담시는 원래 괴이하기 짝이 없는 사람으로서 아도, 묵호, 마라난타 등과 그 연대며 사적이 서로 공통되고 있으니, 세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 필경 담시로서 그 이름을 바꾼 게 아닌가, 추측된다.

이들의 행적을 적어 찬한다.

 

금교에 눈이 덮여 풀리지 않아 계림 땅에 봄빛이 돌지 않을 제 깜찍할손 봄의 신은 제사도 많아 앞질러 모랑(모록을 가리킴)의 집 매화나무에 달라붙었네.

 

- 끝 -

 

<<삼국유사>>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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