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삼국유사

미륵선화(彌勒仙花), 미시랑(未尸郞), 진자사(眞慈師), 신라의 화랑도, 화랑의 국선,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1/2

반응형

 

<미륵선화 미시랑과 진자사> - 1/2

 

24대 진흥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종이라고도 했다. 양나라 무제 39(540)년에 즉위했다. 왕은 그 백부인 법흥왕의 뜻을 흠모하여 일념으로 불교를 받들어 널리 절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제도하여 승려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왕은 그 천성의 취향이 무척 신선(신라 고유의 국풍인 원화, 화랑의 도를 중국의 신선도에 빗대어 하는 말임)을 숭상했다 하여 왕은 민간의 낭자들 가운데서 아름다운 자를 가려 원화로 올려 세우고, 그 원화 아래 무리를 모아들여 인재를 선발하는 동시에 그들을 효제충신의 도리로 함양시키려고 했으니 이 역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의 하나의 대요다. 비로소 남모랑과 교정랑(<삼국사기>에는 준정이라고 했음)의 두 원화를 뽑아 세우자 모인 무리가 3400명이나 되었다.

 

교정랑이 남모랑을 질투했다. 그래서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랑에게 취토록 술을 먹인 뒤에 아무도 모르게 북천으로 메고 나가 돌로 묻어 죽여 버렸다. 그 무리들은 남모랑의 간 곳을 몰라 슬피 울며 헤어졌다. 어떤 사람이 교정랑의 그 음모를 알고 있었다. 그는 동요를 지어 길거리의 어린이들을 꾀어 그것을 부르고 다니게 했다. 원화의 무리들이 그 동요를 듣고는 북천에서 남모랑의 시체를 찾아내고, 그리고 교정랑을 죽여 버렸다. 이에 진흥왕은 명을 내려 원화의 제도를 폐지해 버렸다. 폐지된 채로 여러 해가 지나갔다.

 

왕은 또 한 번 생각하기를 국가를 진흥시키려면 모름지기 먼저 풍월도’(화랑도를 말함)를 진작시켜야 된다고 하여 다시 명을 내려 양가의 자제들 가운데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화랑으로 고쳐 세웠다. 최초로 설원랑을 맞아 국선’(낭도의 총지도자격인 화랑)으로 삼았다.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작이다. 그래서 명주에다가 이를 기념할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회개하여 선으로 옮아가게 하고, 웃사람들에게는 공경을 하고 아랫사람들에게는 온화하게 하도록 하니, 오상과 육예, 삼사와 육정의 도(‘오상은 인, , , 지 신, ‘육의는 예절, 음악, 활쏘기, 말타기, 서예, 산수, ‘삼사는 태사, 태부, 태보, ‘육정은 성신, 양신, 충신, 지신, 정신, 직신을 말한다. 이것은 모두 유교적인 바탕의 중국 고체제의 것을 저자가 신라의 화랑도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것임)가 대대로 널리 행하게 되었다(<국사>에는 진지왕 대건 8년 경신년에 처음으로 화랑을 받들었다고 했으나 아마 사전의 잘못일 것임).

 

반응형

 

진지왕대에 이르러서다. 흥륜사에 진자(‘정자라 쓰기도 함)란 중이 있었다. 그는 매양 당주 미륵상 앞에 나아가 서원을 일으켰다.

 

우리 대성이시여! 부디 화랑이 되시어 세상에 출현하옵소서. 저가 항상 그 온화하신 모습을 몸소 가까이 하여 받들어 시종하고 싶나이다.”

 

그의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기도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독실해졌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중이 나타나 그에게 알려 주었다.

 

그대는 웅천(지금의 공주를 가리킴)의 수원사로 가라. 거기서 미륵선화를 볼 수 있으리라.”

 

진자는 꿈을 깨어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드디어 그 절을 찾아 열흘 동안의 행정을 갔다. 그는 한 걸음마다 한 번씩 합장 배례를 하면서 갔다. 수원사에 이르자 절문 밖에 미려하게 생긴 한 도령이 서 있었다. 도령은 그 고운 눈매며 입언저리에 반가운 웃음을 머금으며 진자를 맞아서는 절의 소문으로 인도해 들어가 객실로 영접했다. 진자는 얼떨결에 한편으로는 댓돌로 오르며 한편으로는 읍을 하며 그 도령에게 말을 걸었다.

 

도령은 나와는 평소에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어찌 나를 대우함이 이토록 정성스러우시오!”

 

그 도령은 대답했다.

 

저도 또한 서울(신라의 서울을 가리킴) 사람입니다. 스님께서 멀리에서 오심을 보고 그저 위로를 드릴 뿐입니다.”

 

조금 있다 문 밖에 나가 보았더니 그 도령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진자는 하나의 우연이리라 생각하고 그다지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만 그 절의 중들에게 자기의 전날의 그 꿈이며 수원사로 온 의도를 얘기하고, 그리고 청탁해 보았다.

 

잠시 말석에라도 몸을 붙여 미륵선화를 기다렸으면 하는데, 어떻소?”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3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