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백월산의 두 성자,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 2/3
달달박박은 백월산 북쪽 줄기에 있는 사자 바위를 차지하여 여덟 자짜리 방의 판옥을 지나 거처했다. 그래서 박박의 그 판옥을 ‘판방’이라 한다. 노힐부득은 산 동쪽 줄기의 첩첩한 바위 아래 물이 흐르고 있는 곳을 차지하여 역시 방장(승려의 거실을 말함)을 이룩하여 거처했다. 그래서 부득의 그 방장은 ‘뇌방’이라 한다(<향전>에서는, 부득은 산의 북쪽 유리동에 있었으니 지금 판방이 그것이요, 박박은 산의 남쪽 법정동 뇌방에 있었다고 하므로 여기의 기록과는 상반된다. 지금 고증해 보면 <향전>의 것이 잘못되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암자에 들어 부득은 열심히 미륵을 찾고, 박박은 미타(아미타불의 약칭 또는 무량불이라고도 한다. 이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십만억불토를 지나서 있다는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란 이상향에 있으면서 설법하고 있다는 부처다. 48대원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장구한 수행을 지나 성불했다고 함)를 염송했다.
두 사람이 암자를 짓고 수도에 든 지 3년이 채 못 된, 당 종종 26년, 즉 성덕왕 즉위 8(709)년 4월 8일이다. 날이 막 저물어 갈 즈음 나이 20세쯤 되어 보이는, 자태가 절묘하고 채취가 향기로운 한 낭자가 뜻밖에 박박이 거처하는 북암(<향전>에는 ‘남암’이라고 했음)으로 찾아와 자고 가기를 청했다. 낭자는 박박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해 저문 산골에 갈 길 아득하고
길 막히고 인가 멀어
고궁에 놓인 몸
오늘은 이 암자에 묵고 가려 하오니
자비하신 화상이여 노여워 마오.
박박은 말했다.
“절간은 청정을 지키는 것을 요무로 삼고 있소. 그대가 접근할 곳이 아니니 지체 말고 가도록 하오.”
그리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기에는 박박이 낭자더러 ‘나의 백념은 식은 재처럼 싸늘해 있으니 혈낭으로 시험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임). 낭자는 노힐부득이 거처하는 남암으로 갔다. 그리고 앞서와 같은 청을 했다. 그러자 부득은 낭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느 곳에서 이 저문 날에 오시오?”
낭자는 대답했다.
“담연히 태허와 일체인데 어찌 오고 감이 있겠소?(‘태허’는 하나의 우주 본체를 의미하고 ‘담연히 태허와 일체인데 어찌 오고 감이 있겠소?’라고 한 말은 곧 선답임) 다만 스님의 염원이 깊으시고 덕행이 높으심을 듣고서 도와 보리를 이루게 해 드리려 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게(불가의 시가) 한 편을 지어 보였다.
첩첩산곡에 날은 저물어,
가도 가도 고궁의 땅.
송죽의 그늘은 더욱 깊어 가는데,
골을 올리는 냇물 소리 오히려 새롭다.
자고 가길 청함은 길 잃은 탓 아니요,
스님을 성불에의 길로 인도하려 함인 것.
바라옵나니
나의 소청만 들어 주실 뿐
누구이냐고 묻질 랑 말아 주오.
부득사는 게를 듣고 놀라며 말했다.
“이곳은 부터자의 더럽힐 곳이 아니오. 그러나 중생을 수순함도 역시 보살행(여기의 ‘보살행’은 기실 보현십원을 가리킨다. 즉 보현보살이 발한 열 가지 큰 행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보살을 대표하며, 모든 보살들의 발심수행에의 길이 그 열 가지 가운데 ‘항상 중생을 수순할 것’이란 일조가 있음)의 하나인 것. 더욱이 이 심산궁곡에 밤이 어두운데 어찌 홀대할 수야 있겠소.”
그리고는 암자 안으로 맞아들여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밤이 되어 부득사는 마음을 맑히고 지조를 가다듬어 바람벽에 희미하게 등물을 걸어 두고 염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윽히 밤이 깊어서다. 낭자가 부득사를 불렀다.
“제가 불행히도 마침 산기가 있습니다. 화상께선 짚자리를 좀 깔아 주십시오.”
부득사는 애긍히 여겨지는 마음에 거절할 수가 없어 촛불을 밝히고 간곡히 보살펴 주었다. 낭자는 해산을 하고 난 후, 또 목욕을 할 것을 청했다. 부득사의 마음엔 거북함과 두려움이 뒤섞여 들었다. 그러나 애민의 정이 더욱 솟아나 또 통을 준비하여 낭자를 그 속에다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켰다.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