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삼국유사

미륵선화(彌勒仙花), 미시랑(未尸郞), 진자사(眞慈師), 신라의 화랑도, 화랑의 국선,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1/2 - 1/2 제24대 진흥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종이라고도 했다. 양나라 무제 39(540)년에 즉위했다. 왕은 그 백부인 법흥왕의 뜻을 흠모하여 일념으로 불교를 받들어 널리 절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제도하여 승려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왕은 그 천성의 취향이 무척 신선(신라 고유의 국풍인 원화, 화랑의 도를 중국의 신선도에 빗대어 하는 말임)을 숭상했다 하여 왕은 민간의 낭자들 가운데서 아름다운 자를 가려 ‘원화’로 올려 세우고, 그 원화 아래 무리를 모아들여 인재를 선발하는 동시에 그들을 효제충신의 도리로 함양시키려고 했으니 이 역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의 하나의 대요다. 비로소 남모랑과 교정랑(에는 ‘준정’이라고 했음)의 두 원화를 뽑아 세우자 모인 무리가 3천 400명이나 되었다.. 더보기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죽령 동쪽 100리쯤의 지점에 우뚝이 버티고 선 한 산이 있다. 진평왕 즉위 46(624)년, 한 길 입방의 커다란 돌이 하나 하늘에서 그 산 꼭대기로 떨어졌다. 사방 여래가 조각되어 있었고 그 조각들은 붉은 빛깔의 사포로 둘러싸여 있었다. 왕은 그 소실을 듣고 현지로 가서 여래가 조각되어 있는 그 돌을 우러러 경의를 표했다.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대승사(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사불산에 있던 절)라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이름이 망실 되었지만, 연경(법화경의 다른 이름)을 외는 한 비구를 청해다 그 절을 맡게 하고 항상 그 돌을 깨끗하게 보존해 왔으며 향화를 끊이지 않았다. 그 산을 역덕산 또는 사불산이라고 했다. 비구가 죽고 나서 그를 장사지낸 무덤 위에는 연이 돋아났다. 다음 경.. 더보기
보장봉노(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보장왕의 도교, 고구려의 연개소문,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2/2 - 2/2 개금은 왕에게 진언했다. “솥에는 세 개의 발이 있고, 나라에는 삼교가 있는 법입니다. 제가 살펴보니 나라 안에 단지 유교,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왕은 개금의 말을 그럴싸하게 여기고 당나라에 요청했더니 당 태종은 서달 등 도사 8명을 보내 주었다(에는 무덕 8년 을유에 사자를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구하니 당나라 황제가 이를 허락했다고 했다. 이에 의거해 본다면 양명이 갑술년에 죽어 이 땅에 환생했다면 그 나이가 겨우 10여 세인데, 재상의 직위로 왕을 설득하여 사자를 당나라에 보내어 도교를 요청했다 하므로 그 연월일에 반드시 어느 한 곳의 잘못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둘 다 기록해 둔다. 무덕 8년은 당나라 고조 8(625)년, 갑술년은 수나라.. 더보기
보장봉노(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보장왕의 도교, 고구려의 연개소문,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1/2 - 1/2 의 기록이다. 고구려 말기, 당나라의 고조, 태종 연간에 고구려 사람들이 다투어 오두미교(도교를 가리킨다. 처음에는 신도들에게 쌀 5두씩을 받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도교는 후한의 장도릉이 부적, 주술 따위를 사용하는 인간 신앙으로 시작하여 북위의 구겸지에 이르러 도교 사상의 창도자인 노자를 받들어 교조로 하고, 장도릉을 대종으로 하면서 도료란 명칭이 비로소 성립되었고, 당나라에 들어와 성행되었음)를 신봉했다. 당 고조가 이 소식을 듣고서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도교에서 천신을 일컬어 천존이라 한다. 천시천존, 앙보천존 따위가 있음)을 보내어 오고, 그리고 (공자보다 선배인 노자의 저서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 않음. 도가 사상의 취지가 담긴 책으로, 일면 ‘노자’니 ‘경’자가 붙은 것은 후세.. 더보기
아도기라(阿道基羅), 신라 불교의 기초, 묵호, 아도, 담시 이야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3/3 - 3/3 아도의 어머니 고도령이 신라 서울 안 일곱 군데의 절터를 차례로 든 것은 곧 그 개창의 선후를 예언한 것이나, 두 기록이 잘못 됨으로써 사천미의 절터를 다섯째에다 놓은 것이다. 그리고 ‘3천여 개월’이란 것도 꼭 그대로 믿을 것은 못된다. 눌지왕대의 법흥왕 14(527)년(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의 연대임) 까지는 100여 년이 되는데 만일 1천여 개월이라면 거의 닿는다. 성을 ‘아’라 하고 이름을 외글자인 ‘도’로 한 것은 잘못인 것 같으나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음은 북위의 승려 담시(일명 ‘혜시’라고도 함)의 전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담시는 관중(장안을 말함) 사람으로서 출가한 뒤에 이적이 많았다. 동진 효무제 12(384)년 말에 경, 을,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에 가서 교..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