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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 원효대사와 그의 아들 설총,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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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구애되지 않다> - 2/2

 

그때 요석궁(지금 학원의 바로 그곳임)에 홀로 된 공주가 있었다. 무열왕은 관리를 시켜 원효사를 찾아 요석궁으로 인도해 들이게 했다. 궁리가 왕명을 받들고 원효를 찾아다니다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사천은 속언에 모천또는 문천이라 하고, 다리 이름은 유교라 함)를 지나는 원효사와 만났다. 원효사는 일부러 물에 떨어져 함빡 옷을 끌러 말리도록 했다. 이리하여 원효사는 그 요석궁에 유숙했다.

 

요석공주는 과연 임신을 하더니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천생의 자질이 영민했다. 널리 경사와 사기에 통달했으니 신라 십현 가운데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방음(우리나라 말. 여기서는 이두, 향찰식 언어 체계를 가리킴)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풍속과 물명에 통회하고 육경, 문학을 훈해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이 땅의 경서 수업자들이 전수하여 끊어지지 않고 있다.

 

원효사는 이미 파계하여 총을 낳은 뒤로는 세속의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일컬었다. 우연히 광대들이 무롱하는 큰 박을 보았다. 그 형상이 진기했다. 원효사는 광대의 그 박의 형상을 따라 도구를 만들어 무애’(‘무애인번뇌, 즉 보리’, ‘생사, 즉 열반의 원융, 무애한 도리를 증득하여 지혜가 융통, 무애한 사람을 가리킴)란 이름으로 그 도구를 명명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노래 무애가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도구를 가지고 원효사는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춤추고 다니며 교화를 펼치고 돌아왔다. 하여 저 오두막집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모두 불타의 명호를 알게 하고 염불 한 마디는 다 할 줄 알게 했으니 원효사의 끼친 교화는 참으로 크기도 하다.

 

그가 출생한 마을을 불지촌이라 이름하고, 그의 집을 회사하여 만든 절을 초개사라 이름하고, 그리고 또 자칭 원효라고 한 것들은 모두 불일을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원효라는 말도 또한 우리나라 말에서 뜻이 취해진 것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우리나라 말로써 새벽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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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화엄경소를 저술했는데, 40권 회향품에 이르러 끝맺고는 절필했다. 또 언젠가는 공사로 인해서 몸을 백송으로 나눈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위계의 초지(보살의 수행하는 계단인 52위 가운데 제41위로부터 제50위까지인 10지위의 첫 계단 환희지를 가리킴. ‘10지위는 불지를 일으키고 능히 주지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며, 온갖 중생을 짊어지고 교화하고 이익 되게 하는 것이 마치 대지가 만물을 싣고 이들을 이익되게 함과 같으므로 라고 했음. 그 첫 계단인 환희지는 처음으로 참다운 중도지를 내어 불성의 이치를 보고 견혹을 끊으며 능히 자리이타하여 진실한 희열에 가득찬 지위임)라고 일렀다. 원효사는 또한 해룡의 권유에 의하여 노상에서 조서를 받고 <금강삼매경소>를 저술했다. 그 저술을 할 때 필연을 소의 두 뿔 위에 놓아두고 했다고 해서 그것을 각승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각승이란 또한 본각과 시각(‘본각은 근본 각체, 온갖 유정, 무정한 것들에 통한 자성의 본체로서 갖추어 있는 여래장진여. 즉 우주 법계의 근본 본체인 진여의 이체를 말함. ‘시각은 이 본각, 즉 그 자성 본체로서 갖추어 있는 여래장진여를 수행의 공력에 의거하여 각증한 각임. 예를 들면 동일한 금덩어리를 두고 땅속에 파묻혀 있을 때의 그것을 본각이라 한다면, 노력을 하여 파냈을 때의 금덩어리가 시각이 됨)의 오묘한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대안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으니 역시 의미를 알고 둘이서 주고받은 것이다.

 

원효사가 입적하자 아들 총은 그 유해를 바수어 진용을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해 두고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뜻을 표했다. 총이 그때 원효사의 소상 곁에서 배례했더니 소상이 홀연 돌아다보았다. 지금도 소상은 여전히 돌아다보는 채로 있다. 원효사가 일찍이 거처한 적이 있던 혈사 곁에 설총의 집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를 찬한다.

 

각승을 지어 삼매경의 종요로운 뜻 열어 보이고,

표주박 무롱하며 거리거리 교화를 베풀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이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다보는 모습(설총을 돌아다본 원효대사의 진용을 가리킴)만 남았네.

 

- 끝 -

 

<<삼국유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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