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종의 대현과 화엄종의 법해>
유가종의 조사인 대덕 대현은 남산(경주의 남산을 가리킴) 용장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절에 미륵의 석장육상이 있어 대현은 항상 그 석상을 돌았는데 그럴 때면 그 미륵상도 역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리곤 했다.
대현은 총혜, 연민하고 결택이 분명했다. 대개 법상종(유가종)은 그 지취며 이치가 심오하여 해부, 분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중국의 명사 백거이(당나라의 시인 백낙천)도 일찍이 그것을 궁구하다 능통하게 되지 못하고 말하기를 ‘유식은 깊숙하여 깨틀기 어렵고 인명(고대 인도의 논리학)은 갈라보아도 열리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다. 이러므로 배우는 이들이 전승해 받기 어려워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현만은 그 어려운 법상종에 능통하여 사류를 판정해 놓고, 잠깐 그 심오함을 열어 보이며 구석구석 막히는 데가 없었다. 그래서 동국의 후진국들이 모두 그의 가르침은 준수함은 물론 중국의 학자들도 왕왕 대현의 가름침을 가져다 안목을 삼는 수도 있곤 했다.
경덕왕 즉위 12년, 즉 당 현종 42(753)년의 일이다. 그해 여름, 날이 몹시 가물어 왕은 대현을 내전으로 불러들어 <금광경>(<금광명경>. 이 경전은 나라를 수호하는 미묘한 경전으로 존숭되었음)을 강하고 단비가 내리도록 빌게 했다. 어느 날 재를 올릴 때에 대현이 부수를 받기 위해 바리를 내밀고 한참을 있었으나 뒷바라지하는 자가 정수를 떠나 바치는 것이 늦었다. 감독하는 관원이 힐책하자 그 뒷바라지 하는 자가 긍정의 우물이 말라 버려 먼 곳에서 물을 길어 오느라 늦었노라고 그 까닭을 말했다. 대현은 듣고 나서 그렇다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하고, 낮강을 할 때에 향로를 받들고는 묵묵한 태도를 짓고 있었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말랐던 그 궁정의 우물에서 갑자기 물이 솟아나와 물길의 높이가 7장 가량, 찰당(절을 세우는 당간)의 높이와 같았다. 궁정 안이 모두 놀랐고, 그 일로 해서 그 우물은 ‘금광정’이라 불렀다.
대현은 일찍이 ‘청구사문’이라 스스로 일컬었다.
찬한다.
남산에 살며 불상을 돌매 불상도 따라 돌아봤나니
청구(우리나라의 다른 이름)의 볼일은 다시 충천에 걸리었구나
궁정에 용솟음치는 맑은 저 물이 뉘 알랴
그것이 금로의 한 줄기 향연의 비밀이었음을
대현이 금광경을 강하며 기우를 했던 그 이듬해 갑오년 여름에 왕은 또 대덕 법해를 황룡사에 초청하여 화엄경을 강하게 하고 왕도 친히 거동하여 분향의 예를 행했다. 그리고는 왕은 조용히 법해에게 말했다.
“지난해 여름에 대법사는 금광경을 강하여 우물을 7장의 높이로 솟아나게 한 적이 있는데 그대의 법도는 어떠하오?”
법해는 답했다.
“그런 정도는 단지 조그마한 일일 뿐인데 뭐 그리 칭찬할 거리가 되겠습니까? 지금 바로 창해를 기울여 동악(토함산을 가리킴)에 넘쳐 오르게 하여 서울로 표류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왕은 법해의 말을 곧이듣지 않고 하나의 농담이려니 여기고 있었다. 한낮에 강을 할 때 법해는 향로를 당기어 잡더니 잠잠히 하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뒤에 내궁에서 갑자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궁리가 달려와 보고하기를 동지의 물이 넘쳐나 내전 50여 간이 표류했다는 것이다. 왕이 망연자실하자 웃으면서 말했다.
“동해가 기울어지려고 수맥이 먼저 불어났을 뿐입니다.”
왕은 부지중에 일어나 법해에게 절을 했다.
그 이튿날 동해변에 있는 감은사에서 아뢰오기를 어제 한낮에 바닷물이 넘쳐 올라 불전의 뜰 앞까지 이르렀다가 물러갔다고 했다. 왕은 더욱 법해를 믿고 존경했다.
찬한다.
법해의 물결 법계에 질펀하여
사해를 불리고 줄임도 어렵지 않았네
백억의 수미산 크다고 말하지 말라
모두 우리 스님의 한 손가락 끝에 있나니
- 끝 -
<<삼국유사>> 제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