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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관동풍악발연수석기(切關東楓岳鉢淵藪石記)(이 기는 영잠이 찬한 것. 승안 4년 기미에 돌을 세웠음. 승안은 금나라의 장종 연호로 그 4년은 고려 신종 2(1199)년임),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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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 풍악의 발연수 석기> - 2/2

 

진표사가 금산에서 나와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 웬 우차를 타고 가는 사람을 만났다. 그런데 그 소들이 진표사를 향해 무릎을 굻고 우는 것이 아닌가, 우차를 타고 있던 사람은 수레에서 내려 물었다.

 

어쩐 일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가요? 스님께선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진표사는 답했다.

 

나는 금산수의 진표승이외다. 나는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으로 들어가 미륵과 지장 두 보살님 앞에서 친히 계법과 진생(앞에서 미륵보살이 진표사에게 주었다는 2개의 간자를 가리킴)을 받고서 절을 지어 오래 수도할 만한 곳을 찾으려고 오는 길이요.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나 속으로는 총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꿇어 앉아 우는 것이요.”

 

그 사람은 듣고 나서 말했다.

 

축생도 오히려 이 같은 신앙심이 있는데 하물며 내가 사람이 되어서 어찌 무심하리요!”

 

그리고는 곧장 낫을 집어 들더니 스스로 두 발을 잘라 버렸다. 진표사는 자비심으로 다시 머리를 깎아 주고 계를 주었다.

 

진표사는 속리산의 동곡으로 가서 길상초가 나 있는 곳을 보고서 그곳을 표시해 두고 다시 명주 해변으로 향했다. 진표사가 천천히 해변을 가노라는데 바다에서 고기며 자라 등속들이 나타나 진표사의 앞을 향하여 육지와 같이 튼튼하게 서로 몸들을 연결해 나갔다. 진표사는 그들을 밟고 바다에 들어가 계법을 창념해 주고는 도로 나와서 고성군으로 가서 개골산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비로소 발연수를 창시하여 점찰법회를 열고 7년간을 머물렀다. 그때 명주 지방에 흉년이 들어 인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진표사는 그들을 위해 계법을 설해 주었다. 사람마다 모두 계법을 받들어 3보에 공경을 다하매 문득 고성 해변의 무수한 고기들이 스스로 죽어나왔다. 사람들은 이 고기를 팔아 먹이를 마련하여 아사를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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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표사는 발연수에서 나와 다시 불사의 방으로 갔다. 그런 뒤에 고향으로 가서 부친을 뵈었고 또는 진문대덕의 거처로 가서 머물러 있기도 했다. 그때 속리산에 있던 고승 영심이 고승 융종과 불타 등과 함께 진표사에게로 와서 청했다.

 

저희들은 천리를 멀다 않고 계법을 구하러 왔나이다. 바라옵건대 법문을 주소서.”

 

진표사가 묵연히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 위로 올라가 거꾸로 떨어져 용맹히 참회했다. 진표사는 그제야 그들에게 전교, 관정(본래는 인도에서 임금의 즉위식이나 태자 책립식을 할 때에 바닷물을 정수리에 붓는 의식, 불교, 특히 진언종에서 수계 할 때 정수리에 향수를 붓는 의식)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와 <공양차제비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 2권 및 189생을 그들에게 주고, 다시 미륵의 진생 자와 자를 주면서 고계했다.

 

자는 법이요, 자는 신훈성불종자다.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맡겼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가 나는 곳이 있으니 거기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하여 널리 인간 세계를 제도하고 후세에 유포하도록 하라.”

 

영심들은 진표사의 이 교시를 받들어 곧장 속리산으로 갔다. 길상초가 나는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길상사라 이름 했다. 영심은 여기서 비로소 점찰법회를 개설했다.

 

진표사는 그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수로 와서 같이 도업을 닦다가 효도를 마쳤다. 진표사는 돌아갈 때 절 동쪽의 큰 바위 위에 올라가 입멸했다. 제자들은 그 시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공양하다가 해골이 흩어짐에 이르러 흙으로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 그 무덤에는 청송이 곧 자라나왔다. 세월이 오래 되어 말라 죽자 다시 한 그루가 생겨나오고 나중에 또 한 그루가 생겨 나왔는데 그 뿌리는 하나였다. 지금도 한 쌍의 청송은 남아 있다. 무덤에 경의를 드리는 이들이 그 소나무 밑에서 뼈를 찾아 얻기도 하고 또 얻지 못하기도 했다. 내가 성골이 아주 없어질까 우려하여 정사년 9월에 특히 작정하고 그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에 담으로 3홉 가량 되었다. 그래 그 큰 바위 위 쌍소나무 아래에 돌을 세우고 뼈를 안치했다.

 

이 책에 실은 진표율사의 사적(‘이 책에 실린 진표율사의 서적이란 곧 <삼국유사>진표전간조를 가리킴)이 발연수에 있는 석기와 서로 같지 않은 점이 있으므로 영감이 기록한 것을 간략히 하여 실어두는 것이니 후일의 사람들은 참고할 일이다. 무극(<삼국유사>의 지은이 일연의 제자임)은 적는다.

 

- 끝 -

 

<<삼국유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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