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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梨木), 보양사,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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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양과 배나무>

 

조사 보양이 중국에서 법을 전해 받고 본국으로 돌아오느라 서해를 건널 때다. 용왕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이어 경을 염송케 하고, 금라가사 한 벌을 보시했다. 그리고 용왕은 겸하여 그의 한 아들 이목을 딸려 보내어 보양사를 모시고 가게하고서 다음과 같은 말로 보양사에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지금 3국이 소용하여 아직 불법에 귀의하는 군주가 없지만 만일 내 아들과 함께 본국의 작갑으로 가서 절을 짓고 있으면 적을 피할 수 있고, 또 수년이 못되어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군주가 나와 3국을 평정할 것이다.”

 

보양사는 용왕과 작별하고 돌아와 이 동리에 이르렀다. 그때 홀연히 한 노승이 자칭 원광이라 하면서 인궤를 안고 나타나 그것을 보양사에게 전수하고는 사라졌다(원광은 진나라 말기에 중국에 들어갔다. 개황 연간에 돌아와서 가서갑에 거주, 황룡사에서 죽었으니 청태 초년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300년이 된다. 이제 제갑들이 모두 폐해진 것을 비탄하다 보양이 와서 장차 폐사를 일으키려는 것을 보고 기뻐서 고한 것이리라). 이에 보양사는 장차 폐사된 절을 다시 일으키려고 북령에 올라가 바라보매 들에 5층 황탑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북령에서 내려와 찾아보았더니 아무런 자취도 없었다. 다시 올라가 보니 한 무리의 까치떼가 땅을 쪼고 있었다. 보양사는 서해의 용왕이 작갑이란 말을 했던 것을 상기하고서 찾아 내려와 그곳을 파 보았다. 과연 해묵은 벽돌들이 무수히 남아 있었다. 그것들을 모아 쌓아올려 탑을 이룩하자 벽돌은 하나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고 꼭 맞아 떨어졌다. 이로써 그곳이 지난날의 절터임을 알았다. 절 세우기를 마치고 보양사는 거기에 머물렸다. 그리고 이름을 작갑사라고 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태조(고려 태조 왕건을 말함)3국을 통일했다. 태조는 보양사가 이곳에 와서 절을 지어 거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5(대작갑, 소작갑, 소보갑, 천문갑, 가서갑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경남 청도군 일대에 있었던 신라 시대의 절로서 후삼국의 분란이 있을 때 모두 폐사되었다고 함)의 전토 500결을 작갑사에 헌납했다. 그리고 후당의 폐제 4, 즉 태조 20(939)년에 사액하여 운문선사라 이름 짓고 용왕이 준 그 금라가사의 영이한 음조를 받들게 했다.

 

용왕의 아들 이목은 항상 절 곁의 조그만 곳에 있으면서 은근히 법화를 도왔다. 어느 해엔가 날이 몹시 가물어 곡식이며 채소들이 바싹 말라 들었다. 보양사는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했다. 온 경내가 흡족하게 되었다. 그런데 천제가 이목이 자기의 직분에 넘치는 짓을 했다고 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이목은 그 급박함을 보양사에게 알려왔다. 보양사는 이목을 상밑에 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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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노라니 하늘의 사자가 절 뜰에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보양사는 뜰 앞에 서 있는 배나무를 지적해 주었다.

 

하늘 사자는 그 배나무에 벼락을 치고 올라갔다. 벼락을 맞은 배나무는 시들고 꺾였으나 용이 한번 어루만져 주자 곧 소생했다(일설에는 보양사가 주술을 베풀어 살렸다고 함)

 

그 나무가 근년에 와서 땅에 넘어져 있었는데 어떤 이가 그것으로 몽둥이를 만들어 선법당과 식당에 안치해 두었다. 그 몽둥이의 자루에는 명이 씌어져 있었다.

 

당초 보양사는 중국을 다녀와 먼저 추화(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의 봉성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마침 태조가 동정하여 청도 지경에 이르렀는데 산적이 견성(물에 임하여 뾰족하게 솟은 멧부리가 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그 이름을 혐오하여 견성이라 고쳐 부르고 있음)에 집결하여 교만히 굴고 대적해 오지 않자 태조는 산 아래에 이르러 보양사에게 산적들을 쉽게 제어할 방도를 물었다. 태조의 자문에 보양사는 이렇게 응답해 주었다.

 

대저 개란 짐승은 밤을 지키고 낮은 지키지 않으며 또 앞은 지킬 줄 알되 그 뒤는 잊어버리는 법입니다. 마땅히 낮 시간을 타고 견성의 북쪽으로 쳐들어가십시오.”

 

태조는 보양사의 이 말대로 실행했다. 과연 산적은 패배하고 항복해 왔다. 태조는 그 신이 한 술수에 탄복되어 해마다 근방 고을의 조세 50석씩을 주어 향화를 받들게 했다. 이리하여 그 절에 2성의 진용을 봉안하고, 그리고 이름을 봉성사라고 했던 것이다.

 

그 뒤 보양사는 작갑으로 옮겨가 크게 절을 세우고, 거기서 종생 했다.

 

보양사의 행상은 고전에 실려 있지 않고, 속전에 의하면 석굴사의 비허사(‘비처라고도 씀)와 형제가 된다고 한다.

 

봉성, 석굴, 운문 이 세절은 산봉을 연하여 즐비하고 서로 교통 왕래했다는 것이다.

 

뒷사람이 신라 <수이전>을 개작하여 까치며 탑이며 이목에 관련된 사적을 <원광전>에다 함부로 기록해 넣었고 견성에 관련된 사적을 <비허전>에다 끌어넣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해동승전>의 작자도 그 잘못된 기록을 따라 글을 윤색하고 보양사의 전기는 없이 해서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의문을 일으키고 그릇 알게 했으니 그 얼마나 무망한 일인가.

 

- 끝 -

 

<<삼국유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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