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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이혜동진(二惠同塵), 혜숙법사 이야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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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숙, 혜공, 진 속에 묻혀 살다> - 2/2

 

우조가 장성해서다. 그는 천진공의 매를 길렀는데 그것이 공의 마음에 꽤 들었다. 천진공의 아우로서 지방관을 임명받은 이가 있었다. 그가 임지로 떠나면서 천진공의 매 가운데서도 좋은 놈을 청하여 그곳 관아로 가져갔다. 어느 날 저녁 천진공은 아우가 가져간 그 매가 생각났다. 그는 날이 새면 우조를 보내어 그 매를 가져오게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조가 이미 그것을 알고 잠깐 사이에 그 매를 가져다 새벽에 바치는 것이 아닌가. 천진공은 크게 놀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제야 전날 자기의 종창을 고친 일이랑 우조의 하는 일이 모두 불가사이한 것임을 알았다. 천진공은 우조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지성께서 우리 집에 의탁해 있음을 아지 못하고 광언과 비례로 욕을 주었으니 그 죄를 어떻게 씻으리까? 바로 지금 이후로는 도사(정도로 중생을 인도하는 소승이란 뜻)가 되시어 날을 인도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내려서서 우조에게 절을 했다.

영이함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우조는 드디어 출가, 중이 되어 이름을 혜공이라 고쳤다. 그는 매양 미친 듯 대취해서는 삼태기를 지고 거리로 노래하고 춤추며 다니곤 했다. 그래서 그를 부궤화상이라고 불렀다. 이에 따라 그가 머물고 있는 절도 부개사라고 불렀으니 부개란 곧 =삼태기에 해당되는 우리 말이다. 그는 또 매양 그 절의 우물 속에 들어가 두어 달씩 나오지 않기도 했다. 그래 그 우물의 이름을 법사의 이름을 따서 혜공정이라고 지었다. 그는 우물 속에서 나올 때면 언제나 푸른 옷의 신동이 먼저 솟아나왔다. 때문에 그 절중들은 그 푸른 옷의 신동이 솟아나오는 것으로써 혜공법사가 나올 징후를 알고 있었다. 우물에서 나와도 혜공법사의 옷은 젖어 있는 일이 없었다.

 

만년에 그는 항사사(지금 영일현의 오어사. 속전에 항사인이 나왔다고 해서 세상에서는 항사동이라 이름하고 있음)로 옮겨가 있었다. 그때 원효법사는 제경의 소(‘는 경의 의미를 풀어 소통시킨다는 뜻이다. 석의의 뜻)를 찬술하고 있었는데 그는 매양 혜공사에게 나아가 질의했고, 또는 서로 익살과 장난을 피우기도 했다. 하루는 두 법사가 시냇물을 따라다니며 고기를 잡아먹고 바위 위에다 방변을 했다. 혜공법사가 원효의 변을 가리키며 익살했다.

 

네 똥은 내 고기다(‘네 똥은 내가 잡아 준 고기를 먹고 눈 것이란 말임).”

 

그래서 절 이름을 한편으로 오어사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이 말을 원효법사가 한 말이라고 하나 잘못이다. 향속에는 와전되어 그 시내를 모의천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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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참공이 일찍이 산놀이를 나갔다가 혜공법사가 죽어 산길에 넘어져 있는 걸 보았다. 시체는 이미 퉁퉁 부어올라 구더기마저 생겨나 있었다. 구참공은 혜공법사의 그 모양을 보고 한참 비탄해 마지않다고 산놀이에서 돌아와 서울 성안을 들어와 보니 혜공법사는 또한 잔뜩 취해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다.

 

어느 날 혜공법사는 새끼줄을 가지고 영묘사로 들어와 금당과 좌우의 경루 및 나문의 행랑체를 둘러치고는 그 절 책임자에게 고했다.

 

이 새끼줄은 사흘 뒤에 끌러라.”

 

절 책임자들은 이상히 여겨 그대로 따랐다. 과연 사흘 만에 선덕여왕이 절에 행차하자 지귀심화(선덕여왕을 사모하다 죽은 위귀. ‘심화는 고유명사라기보다 마음의 욕정 또는 울화를 의인화시킨 것임)가 나와 그 절의 탑을 불태웠다. 오직 새끼줄 쳐둔 곳만은 화재를 면했다.

 

다음 신인조사 명랑이 금강사를 창건하고 낙성회를 열었다. 당대의 고승들이 빠짐없이 모여들었으나 오직 혜공법사만이 오지 않았다. 명량은 즉시 향을 사르며 경건히 기도했다. 조금 뒤 혜공법사가 왔다. 때마침 한창 큰 비가 쏟아졌는데 그의 옷은 하나도 젖지 않고 발에는 진흙이라곤 묻은 데가 없었다. 혜공법사는 명랑법사에게 말했다.

 

하도 간곡히 부르기에 왔지.”

 

어쨌든 그에게는 이적이 자못 많았다. 죽을 때에는 공중에 떠서 입적했다. 그리고 사리가 무수하게 나왔다. 혜공법사는 일찍이 승조(중국의 승려로 구마라십 문하 사철의 한 사람. 교리를 잘 알기로는 구마라십 문하에서 으뜸이었음)가 지은 논을 보고 나서 이것은 내가 옛적에 찬술한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으로 그가 승조의 후신임을 알겠다.

 

찬한다.

 

초원에서 사냥질하고 여인의 침상에 눕고

술집에서 노래하고 우물 속에서 잠자더니

외짝 신 남긴 이, 허공에 떠 입적이 이

그 분들은 이제 어디 갔는고

한 쌍 진중한 불속의 연꽃(지극히 희귀한 일을 뜻한다)이었던 것을.

 

- 끝 -

 

<<삼국유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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