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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원광서학(圓光西學), 원광법사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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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 중국에 유학가다> - 5/5

 

불교에 보살계가 있어 그 조항들이 열 가지가 있지만 그대들은 남의 신자가 된 몸이라 아마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이제 세속의 다섯 가지 계가 있으니 그것들은 이렇다. 그 첫째는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써 하라’, 둘째는 어버이를 섬기되 효도로써 하라’, 셋째는 벗을 사귐에 믿음이 있으라.’, 넷째는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말라’, 그리고 다섯째는 산 것을 죽임에 가림이 있으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이를 실천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귀신의 무리들은 말했다.

 

다른 것들은 알았습니다만 이른바 산 것을 죽임에 가림이 있으라.’는 것만은 깨치지 못하겠습니다.”

 

원광법사는 설명해 주었다.

 

육재일(음력으로 매월 8, 14, 23, 29, 30일의 6일이 육재일이다. 6일은 사천왕이 천하를 순행하며 사랑의 선악을 살피는 날이라는 것이다. 또는 악귀가 사람의 짬을 보는 날. 그래서 이 날에는 사람마다 몸을 조심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계를 지켜야 한다고 했음)과 봄, 여름철에는 죽이지 말것이니 이것을 그때를 가림이다. 가축, 즉 마우계견 따위를 죽이지 말 것이요, 미세한 생물, 즉 그 고기가 한 점도 채 못 되는 것들을 죽이지 말 것이니, 이것들은 그 물을 가림이다. 이것도 오직 그 소용에 한해서만이고 결코 많이 죽여서는 안된다. 이상 말한 것들이 세속의 선계다.”

 

귀산의 무리는 말했다.

 

이제부터는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한 치도 어김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후일 귀산과 추항 두 사람은 종군하여 모두 국가에 훌륭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건복 30(613)(진평왕 즉위 35년임) 가을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오자 황룡사에서 백좌도량을 개설하여 여러 고승들을 청해다 경을 강설하게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원광이 최상수로 앉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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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원광법사를 두고 몇 가지를 논의해 본다.

원종(법흥왕의 이름)이 불법으로 일으킨 이래 진량(‘진량은 나루와 다리, 즉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의 교법을 물을 건너는 나루와 다리에 비유했음)은 비로소 놓였으나 당오(도의 심오한 경지를 말함)에는 미처 이르지 못했다. 하여 귀계멸참(, , 3보의 계법에 귀의하여 번뇌를 없애고 참회하는 것)의 법으로 우미해 있는 무리들을 깨우쳐야 했었다. 그래서 원광법사는 그가 주지하고 있던 가서사에 점찰보(점찰경에 의한 법회로, ‘는 우리나라 고유형태의 재단. 점찰경은 점찰선악업보경의 약칭으로 지장보살이 나무쪽을 던져 길흉, 선악을 점하는 악과 참회하는 법 등을 말한 경임)를 설치하여 항규로 삼았던 것이다. 그때 한 단월니(여자 시주를 말함)가 있어 그 점찰보에 전지를 헌납했으니 지금 동평군의 전지 100결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관한 옛 문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원광은 그 성품 허정을 좋아하고 말할 때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었으며 얼굴에 노기를 띠는 일이 없었다. 나이 이미 많아서 수레를 탄 채로 대궐에 들어가기도 했으니 당시 여러 현사들도 덕과 의에 있어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문장의 풍부함은 일국이 경도하는 바이었다. 향년 80여 세로 당 태종 연간(627~649)에 죽었으니 그 부도(원래는 불타, 또는 경을 말하는 것이나 우리나라에서는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석종을 가리킴)는 삼기산 금곡사(현 안강의 서남동이니 역시 명활산의 서쪽임)에 있다.

 

앞의 <당속고승전>에서 원광이 황룡사에서 입적했다고 했는데 그 황룡사란 곳이 어딘지 미상이다. 아마 황룡사의 와전인 듯 하니 그것은 마치 분황사를 왕분사라고 쓴 경우와 같다고 하겠다.

 

위의 <당속고승전>과 우리나라 <향전>의 두 기록에 의거, 비교해 보면 원광의 속성이 전자에서는 박씨, 후자에서는 설씨로, 그리고 원광이 당초 불문에 들어선 곳이 후자에서는 우리나라, 전자에서는 중국으로 되어 있어 마치 별개의 두 사람인 것처럼 돼 있다. 어느 것이 옳은지 그 시비를 함부로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두 기록을 다 실어 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전기들에서는 어느 곳에도 작갑, 이목과 운문의 사실(이 책의 140페이지 보양이목참조)이 적혀 있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 김척명이 항간에 떠돌아다니는 얘기를 잘못 알고 이끌어 와서는 글을 윤색하여 원광법사전을 지으면 운문개산조, 보양사의 사적을 혼합, 함부로 기록하여 한 가지 전기로 만들었다. 뒤에 <해동고승전>의 저자가 김척명이 저지른 그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잘못 인식하고 있다. 이 점을 여기서 명변해 주기 위해 글자 한 자도 가감하지 않고 원광법사의 두 전기의 글을 그대로 실은 것이다.

 

, 수의 시대에는 해동 사람으로서 바다를 건너가 구도한 이는 드물었고 설령 있었다고 해도 그때는 아직 크게 떨치지는 못했었다. 그러다가 원광 이후로는 뒤를 이어 중국으로 유학하는 이가 줄곧 끊이지 않았다. 원광은 바로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찬하다.

 

바다 건너 처음으로 하지의 구름을 뚫으매,

몇 사람이나 그 길을 오가며 맑은 덕을 쌓았던고.

옛날의 그 자취 청산에 남아 있으니,

금곡과 가서에서 그날의 소식 듣겠네.

 

- 끝 -

 

<<삼국유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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