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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원광서학(圓光西學), 원광법사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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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 중국에 유학가다> - 4/5

 

11년간을 머물러 있으면서 널리 삼장에 통효하고 겸하여 유학까지 공부하여 진평왕 22년 경신(<삼국사>에는 이듬해인 신유년에 왔다고 함)에 법사는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기도하자 마침 본국의 중국 조빙사가 왔기에 그를 따라 환국했다. 원광법사는 그 신령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지난날 머물렀던 그 삼기산의 절로 갔다. 밤중에 신령은 역시 원광에게로 와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해륙 먼 길을 어떻게 다녀왔는가?”

 

법사는 말했다.

 

신령님의 크신 은혜를 입어 무사히 갔다 왔나이다.”

 

신령은,

 

나도 또한 법사에게 계를 주노라.”

 

라고 말했고, 이로 하여 생생상제(윤회윤생에서 서로 구제하자는 것)의 약속을 맺었다.

원광법사가,

 

신령님의 진용을 볼 수 있겠나이까?”

 

라고 청하자 신령은 이렇게 일러 주었다.

 

법사가 나의 형상을 보려거든 이른 아침에 동쪽 하늘가를 바라보라.”

 

원광법사가 이튿날 아침에 동쪽 하늘가를 바라보니 커다란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는 가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 신령이 또 왔다.

 

법사는 나의 팔을 보았는가?”

 

원광은 보았으며 무척 신기하더라고 답했다. 이 신령의 긴 팔뚝을 본 일로 하여 그 산을 속칭 비장산이라고 했다. 신령은 또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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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 몸이 있다 해도 무상의 해(‘죽음을 의미함)를 면하지는 못할 것이므로 내가 멀지 않아 이 몸을 그 고개에 버릴 터이니 법사는 와서 나의 영영 가는 혼을 보내다오.”

 

원광법사는 기약한 날짜를 기다려 가서 보았다. 옷 빛깔처럼 검은 한 마리 늙은 여우가 씨근거리다 말고 곧 주어갔다.

 

원광법사가 처음 중궁에서 돌아오자 본국 조정의 군신들은 그를 존경하여 스승을 삼았고, 법사는 항상 대승경전을 강했다. 그 즈음 고구려와 백제가 노상 신라의 변경을 침범해 오곤 하여 왕은 매우 걱정하던 나머지 수나라(마땅히 이라 해야 할 것임)에 군사를 청하려고 원광법사에게 청탁하여 걸병표(청병하는 글)를 짓게 했다. 수나라 황제는 원광법사가 지은 그 걸병표를 보고 나서 30만 군사를 이끌고 친히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이로부터 세인들이 원광법사가 한편으로 유학에도 능통함을 알게 되었다.

 

법사는 향년 84세로 입적, 명활성 서쪽에 장사를 지냈다.

 

다음은 <삼국사 열전>의 기록이다.

현량한 선비인 귀산은 모량부 사람이다. 같은 마을의 추항과는 친우 사이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들 이렇게 논의 했다.

 

우리들이 사군자들과 교유하려고 마음먹으면서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욕을 자초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어찌 현자에게 도를 묻지 않을까 보냐.”

 

그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가서라고도 쓴다. 모두 우리말이다. ‘은 세속에 이라 일컫는다. 그래서 가슬갑을 가리켜 고사라고도 하니 그것은 곧 갑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에서 동쪽으로 9천보쯤에 가서현 또는 가슬현이란 곳이 있고 그 고개의 북쪽 동곡에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곳이다. 가슬갑은 현 경상북도 청도 부근에 위치했음)에 우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산과 추항 두 사람은 원광법사에게 찾아갔다.

 

이 속사는 우매하여 아는 바라곤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 주시어 일행의 계명을 삼게 하소서.”

 

원광법사는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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