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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어산불영(魚山佛影),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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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산의 부처 영상> - 2/2

 

부처께서 만약 이곳에 계시지 않으면 저에게 또 몹쓸 마음이 생길 것이므로 아뇩보제(여러 부처가 깨달은 최상의 묘도와 불지와 정각의 뜻인데 아뇩보제는 범어다. 교행산증에 아뇩보제는 곧 열반계라 하겠음)가 될 길이 없습니다.”

 

그때 범천왕이 다시 나와 부처께 예배하고 청했다.

 

세존께서는 미래세의 모든 중생을 위할 것이니 다만이 작은 한 용만을 위해서는 안 됩니다.”

 

백천의 범왕도 모두 같은 청을 했다. 그때 용왕이 칠보대를 내어 여래에게 올리니 부처는 말했다.

 

이 대는 필요 없으니 너는 지금 다만 나찰이 있는 석굴을 가져다가 나에게 시주하라.”

 

용왕은 기뻤다. 여래는 그를 안위하며 다시 말했다.

 

내가 너의 청을 받아들여 네 굴속에 앉아 1500년을 지내겠다.”

 

부처가 몸을 솟구쳐 돌 속으로 들어가니, 돌은 맑은 거울 같아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용모를 비춰 볼 수 있었다. 모든 용이 다 나타나고, 돌 속에 있으면서 부처는 밖으로 밝은 빛을 비쳐 냈다. 용들이 합장하고 기뻐했으니, 그곳을 떠나 않고도 언제나 부처를 볼 수 있게 되었던 까닭이다.

 

세존은 그 안에서 결가부좌(보행이지일에 결가라는 것은 먼저 오른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앉는 것이라고 했음)하여 앉아 있었다. 중생들이 보면 멀리서는 곧 나타나고 가까이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제천이 부처의 영상을 봉양하니 부처의 영상도 또한 설법했다. 또 이르기를 부처가 바위의 표면을 밟으니 문득 금옥의 소리가 났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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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혜원(곧 혜원(335~417)을 일컫는데, 중국 동진의 고승)이 들으니 천축국에 부처의 영상이 있는데 그것은 옛날용을 위해 남겼던 것으로 북천축 월지국(중앙 아시아에 있었던 월저국) 나갈가성의 남쪽 고선인의 석실 안이다.

 

또 법현(중국 동진 때의 고승 법현을 가리킴)<서역전>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나갈국(지금의 인도 인더스강 상류에 있었던 고대 북인도의 나라 이름)의 경계에 이르면 성의 남쪽에 석실이 있다. 단산(나갈성 남쪽에 있는 땅 이름)의 서남쪽, 그 석실에 부처의 영상이 있다. 10여 걸음 밖에서 그것을 보면 부처의 참모습과 같이 광명이 환하나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하여 보인다. 여러 나라의 왕들이 화공을 보내어 이것을 모사하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현겁의 일천불이 모두 마땅히 여기에 영상을 남길 것이며 그 영상의 서쪽 100보쯤 되는 곳에 여래가 세상에 있을 때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깎던 곳이 있다고 전한다.

 

성자함의 <서역기> 2권에 이런 기록이 전한다.

옛날 여래가 세상에 살아 있을 적에 용은 소먹이가 되어 왕에게 우유를 공급했는데 한번은 잘못된 일이 있어 꾸지람을 들었다. 속으로 원한을 품고 금전으로 꽃을 사서 부처께 공양했다. 그리고 솔도파(<서역기>솔도파는 옛적에 이른바 부도라 했다. 곧 사리의 봉안이나 절의 장엄한 면을 표시하기 위하여 세운 건축물로 범어다. 3, 5층의 것은 탑이라고 하고 작은 판탑파는 솔탑파, 탐파로 통칭함)에 수기(불타가 제자에게 미래의 증과에 대한 설교, 또는 그러한 예언을 주는 일)하여 제발 독룡이 되어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해치게 해 주소서.’하고는 석실로 가서 몸을 던져 죽었다.

 

마침내 그 굴에 살면서 용왕이 되어 주위에 악행을 하자 여래는 신통력으로써 이곳을 이르렀다. 여래를 대하니 용은 독한 마음이 곧 스러지고 불살계를 받게 되었다. 용은 청했다.

 

부처님께서 항상 이 굴에 계시면서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

 

부처는 말했다.

 

내가 장차 입적할 때에 너를 위해 영상을 남길 것이니, 너에게 만약 독하고 분한 마음이 생기거든 그때마다 늘 나의 영상을 보라. 반드시 독한 마음이 사라지리라.”

 

이 말을 남기고 부처는 정신을 가다듬어 홀로 석실에 들어갔다.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 위의 발자취로써 칠보를 삼았다.

 

- 끝 -

 

<<삼국유사>>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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