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의 두 보산 간음, 정취, 그리고 조신> - 3/3
본사에서는 중 조신을 그 장원의 관리인으로 파견했다. 조신은 날리군의 그 장원에 와 있으면서 태수 김흔의 딸을 좋아하여 깊이 매혹되어 버렸다. 그는 누차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의 결합을 남몰래 빌었다. 이러기를 수년간, 그 사이 김흔의 딸은 이미 시집을 가 버리고 말았다. 조신은 관음보살 앞으로 갔다. 관음보살이 자기의 그 비원을 성취시켜 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그는 슬피 울었다. 날이 저물 무렵, 그의 사념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는 깜박 선잠이 들었다.
꿈이다 그 김씨 처녀가 반가운 얼굴로 문을 들어섰다. 함빡 웃으면서 그녀는 조신에게 말했다.
“저는 대사님의 모습을 어렴풋이 알고부터는 마음속 깊이 사모해 왔었지요. 잠시도 대사님을 잊은 적이 없었어요. 부모님의 명령에 뒤몰려 마지못해 시집을 갔었지만, 대사님과 죽어서도 한 무덤에 묻힐 반려가 되고 싶어 지금 이렇게 왔어요.”
조신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40여 년의 세월을 살았다. 자신만이 다섯이나 처졌을 뿐 집안은 휑뎅그렁, 남은 것이라곤 없었다. 나무죽마저도 넉넉하지 못했다. 드디어 실의에 찬 몰골들로 잡고 끌고 하여 호구를 위해 사방을 헤매 다녔다. 이렇게 10년을 초야를 두루 유랑했다. 너덜너덜 해진 옷은 몸을 가리지 못했다. 명주 해현고개를 지나다가 열다섯 살 난 큰 아이가 아사 했다. 통곡을 하며 시체를 거두어 길에다 묻었다.
남은 네 자녀들을 데리고 우곡현(지금의 우현을 가리킴)으로 왔다. 길 곁에다 띠풀로 집을 얽어 들었다. 부부는 이미 늙고 병들었다. 거기다 굶주림에 지쳐 일어나 다니지를 못했다. 열 살 난 딸아이가 돌아다니며 걸식을 했다. 그러나 그 딸아이마저 마을의 개에게 물려 아픔을 울부짖으며 앞에 누워 있었다. 부부는 탄식을 하며 두 줄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렀다. 아내가 눈물을 훔치고 나더니 돌연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날 때는 얼굴도 아름다웠고 나이도 젊었습니다. 그리고 의복도 무색 진한 고운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라도 맛좋은 음식이 있으면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두어 자 옷감이 생겨도 당신과 함께 지어 입었습니다. 이러구러 살아온 지 50년, 정은 더할 수 없이 쌓였고 사랑은 얽히고 얽혀 정말 두터운 연분이라 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노쇠와 병고는 날로 더욱 깊어가고, 기한은 날로 더욱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한 간의 곁방, 한 병의 간장의 구걸도 사람들은 용납해 주지 않았고, 수많은 집 분전에서의 그 수치는 무겁기 산더미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림에 지쳐 있어도 그걸 면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판국이 이러한데 어느 겨를에 부부간의 애정을 즐기겠소? 젊은 얼굴 예쁜 웃음은 풀잎위의 이슬 같고 굳고도 향기롭던 그 가약도 한갓 바람에 날리는 벌들개지 같구료! 당신에게는 내가 있어 짐이 되고, 나는 당신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지난날의 환락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번뇌로 오는 계단이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소? 뭇 새가 모여 있다 함께 굶어 죽기보다는 차라리 짝 없는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소? 순경일 때는 부닐고 역경일 때는 버리는 것이 인정의 차마 하지 못할 짓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가고 머루는 것이 사람의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헤어지고 만남에는 운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여기서 서로 헤어지도록 하십시다.”
조신이 아내의 제의를 듣고 무척 반가와 했다. 네 아이들을 각각 둘씩 나누어 갈라서려 할 때 아내가 말했다.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시오.”
서로 잡았던 손을 막 놓고 돌아서서 길을 나서려 할 때,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다. 쇠잔한 등불은 으스름한 불 그림자를 너울거리고 밤은 이윽히 깊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 있었다. 조신은 멍멍히 넋이 나간 듯, 인간 세상에서의 뜻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미 인간의 그 고된 생애에 염증이 느껴짐이 마치 실제 100년의 신고에 포만 되기라도 한 듯 했다. 탐욕의 마음은 얼음이 녹아 버리듯 말끔히 가시었다. 조신은 관음의 그 성스러운 모습을 부끄러이 우러르며 참회를 금하지 못했다. 해현으로 가서 꿈속에서 아사한 큰아이를 묻었던 자리를 파 보았더니 돌미륵이 나왔다. 깨끗이 씻어서 그 부근의 절에다 봉안하고 조신은 서울로 돌아가 장원 관리의 임무를 벗었다. 그리고 사재를 기울여 정토사를 세우고 부지런히 선업을 닦더니, 나주 그 종언을 알 수 없었다.
논평컨대 이 조신의 전기를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차근히 상기해 보노라면 어찌 꼭 조신 스님의 꿈만 그러하겠는가. 모두들 인세가 즐거운 줄 알고 기뻐 날뛰며 나둥그려 애쓰지만 이것은 단지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이에 시사를 지어 경계한다.
잠시 흥그러워 한가롭더니
어느덧 몰래 우수 속으로 늙음이 오누나.
한 끼 조밥이 익기를(당대의 소설 <황랑몽>의 내용을 배경으로 한 말이다. 주인공 노생이 한단 땅의 여사에서 도사 여옹을 만나 그가 내준 베개를 베고 꿈을 꾸기 시작하는데, 그때 그 여사의 주인은 조를 찌고 있었다. 노생이 꿈속에서 미모의 최씨 부인에게 장가들어 많은 자손들을 두고 높은 벼슬을 지내면서 인생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80이 넘도록 살다가 꿈을 깨었더니 그것은 여사 주인이 찌던 조가 채 익기도 전이었다는 것)
다시 기다릴 새 없이
괴로운 일생이
한바탕 꿈임을 깨달았도다.
몸 닦음의 깊은 뜻은 참되게 함에 있는 것
홀아비는 미녀를 꿈꾸고
도적은 보장을 꿈꾸는 구나.
어찌하면 가을 맑은 밤 꿈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경에 이를거나.
- 끝 -
<<삼국유사>>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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