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 중국에 유학가다> - 2/5
공업이 이미 이루어지매 도를 동방으로 전해야 했다. 본국에서는 멀리 듣고서 글을 올려 원광의 송환을 빈번히 청해왔다. 수제는 칙명을 내려 원광을 두터이 위로하고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원광이 여러 해 만에 고국에 돌아가자 늙은이도 젊은이도 모두 환영했다. 신라왕 김씨(진평왕을 가리킴)는 그를 면대해서는 존경을 표하며 성인을 우러르듯 했다.
원광은 그 성품이 겸허 한정하고 인정이 많아 두루 사랑을 베풀었다. 그리고 말할 때는 언제나 웃음을 머금었으며 성냄을 얼굴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 갖가지 국서들이 그의 흉금에서 나오매 온 나라가 극진히 받들었다. 모두들 그에게 치국의 방도를 위촉하고 교화의 일을 자문했다. 하여 그는 실제 조정의 귀현한 관리와는 다르면서 그에게 청탁은 위정자와 같았다. 그는 이러한 좋은 때를 타고 널리 교훈을 펼쳐 지금까지 전범이 되고 있다. 나이가 이미 높았으므로 수레를 탄 채로 대궐에 들어가노라면 의복이며 약이며 음식들을 왕이 손수 주선하여 좌우에서 돕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서 복을 오로지 받기를 희원 냈으니 그 느껴워하고 존경함이 이와 같았다. 원광이 죽기 전에 왕이 친히 손을 잡고 위안하여 유법과 그리고 제민의 길을 물었더니 그는 징상(길흉의 징조)을 하여 신라 온 나라에 미치게 했다.
건복(신라 진평왕의 연호. 건복은 50년으로 끝났으나 건복 58년을 굳이 인정한다면 선덕왕 즉위 10(641)년이 된다. 그러나 원광이 입적한 것은 선덕왕 즉위 9년의 일임) 58년에 원광은 조금 몸이 불편함을 느끼더니, 그리고 나서 7일을 지나 그는 청절히 유계를 남기고 그가 머물고 있던 황룡사에서 단좌한 채로 종언했다. 나이 99세, 바로 당 태종(마땅히 태종 14년이라 해야 함) 4년 이었다. 그가 임종할 때에 그 절의 동북방 허공에는 음악 소리가 가득했었고, 절 안에서 이상한 향기가 가득차 있어 불도에 종사하는 사람이건 속세에 있는 사람이건 모두 슬퍼하는 한편, 경사로이 여기며 그 영이한 감응을 알았다. 교외에 장사지내매 나라에서는 우의(왕의 행차 때나 쓰는 깃발 등속의 의장)며 장구를 내리어 왕자의 예와 동등하게 했다.
뒤에 태사한 아이를 낳은 한 속인이 있었다. 그 나라[신라]의 속신에 태사한 아이는 유복한 사람의 무덤에 묻어야 자손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 있어 그 속인은 원광의 무덤 곁에다 살그머니 태사한 아이를 갖다 묻었다. 그랬더니 묻은 당일로 태사한 아이의 시체를 벼락 쳐 묘역 밖으로 내던졌다. 이로 말미암아 그 전에 원광에게 존경심을 품지 않았떤 사람들도 모두 그를 숭앙하게 되었다.
원광의 제자로는 원안이란 이가 있어 천품이 영민했다. 그는 역람을 좋아하고 심오한 것의 탐구를 동경했다. 그는 북쪽으로는 구도(고구려의 구도인 ‘환도’의 잘못된 표기임)엘 갔으며 동쪽으로는 불내(지금의 안변. 동예의 옛 땅)를 보았고, 그리고 서쪽으로는 연위(북중국을 가리킴)의 땅을 찾았다. 뒤에 그는 제경(중국의 황제가 있는 서울, 즉 장안을 가리킴)으로 왔다. 방속(중국의 풍속, 문물을 가리킴)에 능통했고, 여러 경론을 탐구했으니 그 대강을 밝아 자세한 의미들에까지 달통했다. 늦게 그는 심학(불학을 가리킴)으로 돌아와 원광의 뒤를 이렀다. 처음에는 서울의 한 절에 머물러 있었다. 평소 도로써 이름이 났으므로 특진 소우가 주청하여 남전에 지은 진량사에 가 머무르게 하고 사사(네 가지 공양거리, 곧 의복, 음식, 와구, 탕약, 소향이 그것임)의 공급에 6시(하루를 낮, 밤 각 세 때를 구분한 것. 즉 아침, 낮, 해질녘, 초저녁, 밤중, 새벽이다. ‘6시’는 또한 1년을 6기로 나눈 것이다. 즉 참열시, 성열시, 우시, 무시, 참한시, 성한시가 그것임)를 어김이 없었다.
원안이 일찍이 원광의 사적을 서술한 것에 다음과 같은 일이 있다. 즉 본국의 왕이 병환에 들어 의원의 치료에도 차도가 없었다. 이에 원광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따로 잘 모시고 밤중에 두 차례로 심오한 법을 설하게 하고 그리고 계를 받아 참회하고서 왕이 크게 신봉했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았더니 금빛이 찬연하고 일륜의 모양을 한 것이 원광의 몸을 따라왔다. 왕후며 궁녀들도 다 같이 이 모양을 보고,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좋은 마음을 거듭 일으켜 왕의 병실에 머물러 있었더니 오래지 않아 왕의 병환은 쾌유되었다는 것이다.
원광은 진한, 마한의 사이에 성히 정법을 통류시켰다. 그는 매년 두 번씩 강석을 열어 후학들을 설법했다. 그리고 그는 시주로 들어온 재물들은 모두 사찰 경영에 충당하고 그에게서 남은 것은 오직 옷과 바리뿐이었다(이상은 ‘달함’에 실려 있음).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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