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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삼국사기>에는 ‘박제상’으로 되어있음), 신라의 충신 김제상,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2/3 - 2/3 왕은 제상을 불러들여 그의 의향을 물어 보았다. 제상은 왕에게 재배를 드리고, 서슴없이 말한다. “저는 들었습니다. 임금에게 근심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 신하가 명예롭지 못하고, 임금에게 명예롭지 못한 일이 있다면 신하는 그 일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만약 일의 어렵고 쉬움을 따진 뒤에야 행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충성이 아니요, 죽을지 살지를 헤아려 본 뒤에야 움직인다면 그것은 용기의 결여입니다. 신이 비록 못난 사람이긴 하오나 명을 받들어 일을 수행하겠습니다.” 눌지왕은 제상의 그 충용을 거듭 찬미했다. 잔들 맞들어 술을 나누고 그리고 왕과 신하는 손을 맞잡고 작별에 임했다. 제상은 왕에게 명을 받은 즉시 동해의 물결을 헤치고 북쪽으로 뱃길을 잡았다. 고구려의 땅에 상륙하자 제상은 변장을 .. 더보기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삼국사기>에는 ‘박제상’으로 되어있음), 신라의 충신 김제상,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1/3 - 1/3 제17대 임금 내물왕 36(391)년, 왜 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왔다. 왜국의 사신들은 내물왕을 뵈옵고 아뢰었다. “우리나라 임금님이 대왕의 신성하시옴을 들으시고서 저희들로 하여금 백제의 죄과를 대왕께 성토하라 하셨습니다. 대왕께선 왕자 한 분을 보내시어 우리나라 임금님에게 성의를 보여주소서.” 이에 내물왕은 셋째 왕자 미해(‘미토회’라고도 쓴다 에는 ‘미사혼’이라 했고, 그가 왜국으로 간 것이 18대 실성왕 원년의 일로 되어 있음)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었다. 그때 미해 왕자의 나이 겨우 10세인지라 언어 행동에 아직 부족한 점이 있었으므로 측근에 있는 신하 박사람을 부사로 딸려 보냈다. 왜 왕은 답례 차로 억류하고서 30년이 지나도록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내물왕의 다른 왕자 눌지는 신라.. 더보기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김유신 장군 혼령, 댓잎사귀를 귀에 꽂은 병정들, 화랑의 전신,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신라 제14대 임금 유리왕 때의 일이다. 이서국 사람들이 서울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 쪽에서도 대거로 방어에 나섰으나 오래 버티어 낼 수 없었다. 홀연히 어디에서 온지도 알 수 없는 신기한 병정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지원해 왔다. 그 신기한 병정들은 모두 댓잎사귀를 귀에 꽂고 있었다. 그들은 신라군과 힘을 합하여 적군을 쳐부수었다. 적군들이 물러간 뒤 그 신기한 병정들은 또 온데간데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다만 미추왕릉 앞에 무수한 댓잎사귀만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제사 귀에 댓잎사귀를 꽂고 왔던 그 신기한 병정들이 미추와 현령의 공임을 알았다. 그래서 미추왕릉을 ‘죽현릉(댓잎 꽂은 병정들이 나타난 능)’이라 불렀다. 제36대 임금 혜공왕 15(779)년 4월 어느 날,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서 갑.. 더보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 신화, 허왕후, 아유타국, 6가야 신화, 구지가, 가락국가의 흥망성쇠 - 6/8 - 6/8 수로왕이 붕어한 후한 헌제 10(99)년에 처음 축조된 때로부터 금상께서 치세하신 지 31년째, 즉 요의 도종 즉위 22(1076)년에 이르도록 878년 동안을 수로왕의 능원은 그 봉토가 헐어지지도 무너지지도 않고 있으며 그 심은 나무들은 말라죽지도 썩지도 않고 있다. 더욱이 진열된 갖가지 보물들도 또한 훔친 것이라곤 없다. 이로써 보면 신체부(당나라 예종 때의 사람)가 말한, ‘예로부터 이제에 이르도록 어찌 망하지 않는 나라, 허물어지지 않는 무덤이 있었을까 보냐’라는 말은 다만 가락국이 망했다는 사실에서는 그 말이 맞지만 수로묘의 허물어지지 않는 사실에서 보면 체부의 말은 전적으로 긍정되지 않는다. 게다가 또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이면 이곳 지망민과 이속들은.. 더보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 신화, 허왕후, 아유타국, 6가야 신화, 구지가, 가락국가의 흥망성쇠 - 5/8 - 5/8 그래서 가야국의 고허를 사자를 보내어 그 묘 가까이에 있는 상상전 30경을 위토로 정하고 그것을 ‘왕위전’이라 이름했다. 그 왕위전은 여전히 신라의 영토 안에 속하도록 했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이 조정의 지시를 받아 왕위전을 관장하여 매년 세시에 술이랑 단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일 등속의 제물을 차려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 제일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 5일, 즉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을 어김없이 지켰다. 아름다운 정성의 이 향사는 지금은 나(여기의 ‘나’는 이 를 쓴 금관지주사 자신을 가리킴)의 소관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거등왕이 즉위했던 해에 변방(평상시에 거처하는 곳이므로 정전과 구별함)을 설치한 이래로 마지막 임금 구형왕 말년까지 330년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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