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 신화> - 5/8
그래서 가야국의 고허를 사자를 보내어 그 묘 가까이에 있는 상상전 30경을 위토로 정하고 그것을 ‘왕위전’이라 이름했다. 그 왕위전은 여전히 신라의 영토 안에 속하도록 했다. 수로왕의 17대손 갱세급간이 조정의 지시를 받아 왕위전을 관장하여 매년 세시에 술이랑 단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일 등속의 제물을 차려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 제일은 거등왕이 정한 연중 5일, 즉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을 어김없이 지켰다. 아름다운 정성의 이 향사는 지금은 나(여기의 ‘나’는 이 <가락국기>를 쓴 금관지주사 자신을 가리킴)의 소관 안에 있게 된 것이다. 거등왕이 즉위했던 해에 변방(평상시에 거처하는 곳이므로 정전과 구별함)을 설치한 이래로 마지막 임금 구형왕 말년까지 330년 동안에 묘에 대한 제향의 의식이 오래도록 어김이 없었으나, 구형왕이 왕위와 그리고 나라를 잃은 뒤 당 고종 12년, 즉 문무왕 즉위년, 문무왕(법민왕의 시호)이 왕위전을 두어 제사를 다시 받들도록 하기까지 60년 동안에는 그 묘에의 제향이 또는 걸러지기도 했던 것이다. 아름답다, 문무왕은, 먼저 조상을 받들었구나, 효성스럽고도 효성스러워라, 끊어졌던 제향을 다시 이어 행하나니…….
신라 말기에 충지 잡간이란 자가 있어 금관고성을 공략하여 성주장군이 되었다. 그때 영규아간이란 자가 성주장군의 위세를 빌어 수로왕 묘의 제향을 뺏어 자기 분수로선 지내서는 안 될 제사를 행했다. 단오날을 맞아 사당에 고사하는 데 까닭없이 대들보가 부러져 내려앉았다. 그래서 그 영규란 자는 압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성주장군 충지는 그 스스로에게 말했다.
“전세의 인연으로, 외람히 성왕이 계시던 이 도성의 제전을 맡게 되었으니 마땅히 그 영정을 만들어 모시고 향등을 바쳐 신령의 은혜에 보답해야지.”
성주장군은 드디어 진귀한 비단 석 자에다 수로왕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리고는 그 영정을 벽 위에 봉안해 놓고 아침저녁으로 기름불을 켜 두고는 아주 경건하게 우러러보곤 했다.
겨우 3일 만에 그 화상의 두 눈에선 피눈물이 흘러 내려 땅바닥에 거의 한 말 가량이나 괴었다. 장군은 겁이 더럭 났다. 그래서 그 영정을 받들고 묘에 나아가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는 즉시 수로왕의 진손인 규림을 불러 말했다.
“어제 불상사가 있었소. 어찌 이런 불상사가 중첩될까? 이건 반드시 묘의 위령이 내가 화상을 그려 불손히 공양한 데 노하신 것인 겁니다. 영규가 죽기에 내가 무척 두려워했더랬는데, 영정은 불태웠으니 반드시 신령의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그대는 왕의 진손이니 그대가 종전대로 제사를 받들도록 하오.”
그리하여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다. 규림이 88세에 죽고 그 아들 간원경이 이어 받들게 되었다. 단오날의 알묘제(묘에 참배하는 제전)에 영규의 아들 준필이 또 발광을 하여 묘에 와서는 간원이 차린 제물을 걷어치우게 하고 자기가 가져온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초헌, 아헌, 종헌이 세 차례의 헌작이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병을 얻더니 집으로 돌아가 죽고 말았다. 옛사람의 말에 ‘음사(자기 분수로는 지내서는 안 될 제사)에는 복이 없고, 도리어 그 앙화를 받는다.’고 했는데 앞서의 영규와 뒤의 준필, 이 부자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또 묘 안에 많은 금옥이 있다고 하여 이것을 훔치러 온 도적떼들이 있었다. 도적떼들이 묘에 첫 번째로 왔을 땐 갑주를 꿰입고 활시위에 살을 얹어 든 맹사 한 사람이 묘 안에서 나타나 사면으로 비 오듯 쏘아댔다. 맹사는 7, 8명의 도적들을 맞혀 죽였다. 도적들은 달아났다가 수일 만에 다시 왔다. 이번에는 길이가 30여 자나 되는, 그리고 안광이 번개처럼 번득이는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묘 곁에서 나타나더니 도적 8, 9명을 물어 죽였다. 겨우 죽음을 면한 자들은 모두 엎어지며 자빠지며 흩어져 달아났다. 이런 일들로 보아 수로왕 능원의 안팎에는 피시 신물이 있어 보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