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 신화> - 7/8
이 절이 세워진 지 500년 뒤에 장유사를 세웠는데 그 절에 귀속된 전토며, 임야가 모두 300결이나 되었다. 그러자 이장유사의 삼강(절에서 대중을 통솔하여 규칙을 유지하는 세 가지 직책으로서 상좌, 사주, 도유나가 그것임)이 왕후사가 자기네 절 임야의 동남쪽 푯말 안에 위치되었다고 해서 그 절을 철폐시켜 농장으로 만들고는 추수와 저장의 장소로, 마소를 기르는 외양간으로 썼던 것이다. 실로 슬픈 일이다.
시조 이하 9대 손의 역수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했다. 사적을 새긴 문구는 이러하다.
혼돈이 처음 열리고 해와 달이 밝게 빛나고 인륜이 비로소 생겼으나 임금의 지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왕조가 벌써 여러 대를 지냈는데도, 동국에서는 아직 서울이 갈려 있었다. 신라는 먼저 정해지고, 가락은 후에 경영되었다.
세상을 통할할 사람이 없으면 누가 인민을 보살피랴. 드디어 상제께서 저 창생들을 돌보셨다.
부명을 주어, 정령을 아래로 내려보내셨다. 알은 산중으로 내려와, 안개 속에 그 형체를 감추었다.
안도 오히려 아득하고 밖도 캄캄했다. 바라보면 형상은 없는 듯 했으나 들으면 곧 소리가 있었다. 군중들은 노래로써 아뢰고, 무리들은 춤을 추기를 7일 간이나 한 후 비로소 안정이 찾아오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터져나오고 여섯 개의 둥근 알이 한 가닥 자줏빛 끈에 매여 내려왔다.
구경꾼이 모이고 쳐다보는 이는 우글거리고 그 낯설은 지방에 가옥이 연달아 지어졌다. 그리하여 다섯 분은 각 읍으로 나누어 돌아가고, 한 분만 이 성에 남아 있었다. 같은 때 같이 한 자취는, 아우와 형과 같았다. 실로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낳아서, 세상을 위해 규정(질서)을 지으셨다. 왕위에 처음 오르자, 세상은 곧 맑고 밝아지려 했다.
궁전은 옛 제도를 따랐고, 흙 계단은 오히려 평평했다. 큰 정사에 힘쓰고 서정을 보살피고 편파와 편의가 없으니, 순일하고 정수할 뿐이었다. 길손은 길을 서로 양보하고 농부는 농토를 서로 사양했다.
사방은 모두 안정해지고 만민이 태평했다.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대춘 같은 수명을 보전하지 못했다. 천지가 기운이 변해지고, 조야가 모두 슬퍼했다. 금바탕 같은 그 발자취요, 옥소리 같은 그 명성이었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영묘의 제전이 깨끗했다. 세월을 비록 흘렀으나 그 규범만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거등왕의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황후, 건안 4년 기묘 (199) 3월 13일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39년 가평 5년 계유(253)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천부경 신보의 딸 모정이며, 태자 마품을 낳았다. 개황력에서는 ‘성은 김씨니 대개 세조(시조)가 금 알에서 난 까닭에 금을 성으로 삼았다’고 했다.
마품왕, 또는 마품이라고 하기도 한다. 성은 김씨, 가평 5년 계유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39년 영평 원년 신해(291) 1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종정감, 조광의 손녀 호구며 태자 거질미를 낳았다.
거질미와, 또는 금물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 영평 원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56년 영화 2년 병오(346) 7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아구앙간의 손녀 아지며, 왕자 이품을 낳았다.
이시품왕, 성은 김씨다. 영화 2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62년 의희 3년 정미(407)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사농경 극충의 딸 정신이며, 왕자 좌지를 낳았다.
좌지왕, 또는 김질이라고도 한다. 의회 3년 왕위에 올랐다. 용녀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벼슬아치로 삼았으므로 국내가 요란해졌다. 신라는 꾀로써 가락국을 치려고 했다. 이때 가락국에 박원도란 신하가 있었다. 그는 좌지왕에게 간해서 말했다.
“유초를 열람하고 열람해도 털어 나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질서가 문란해지면 그 어느 곳에서 보전되겠습니까, 또 술사가 점을 쳐서 해괘를 얻었는데, 그 괘의 말에 ‘소인을 제거하면 군자인 벗이 와서 합심할 것이다.’고 했으니 임금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