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기 (문묘조의 대강 연간에 금관지주사 문인이 찬술한 것이므로 여기 초략하여 싣는다. 문묘조란 고려 11대 문종을 말하고, 대강은 요의 도종 연호 (1075년~1084)다. 그리고 금관은 곧 가락구의 도읍이었던 지금의 김해. 금관지주사는 그 김해 지상의 장관임)
<수로 신화> - 1/8
개벽한 이래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었고, 또한 군신의 칭호 따위도 없었다. 그저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의 9간이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곧 추장으로서 이들이 당시 백성들을 퉁소랬던 것이다. 그 백성들은 모두 100호, 7만 5천인이었다. 많이들 산야에 제각기 집단을 이루어 그저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갈아 밥 먹을 정도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후한 광무제 18년, 즉 신라 유리왕 즉위 19(42)년 3월 계욕일(음력 3월 첫 기일(기가 붙은 간지가 일진으로 든 날)에 체액의 의미로 목욕하고 물가에 모여 술을 마시는 풍습이 있었음)이다. 그곳 북쪽의 구지(이것은 지금도 경산남도 김해군 김해읍 서상동에 있는 구지봉이란 조그만 산봉우리의 이름이지만, ‘10봉의 구’가 엎드린 형상과 같기 때문에 ‘구지’라 부른 것임)에서 뭔가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났다. 무리 2,300인이 그곳 구지봉에 모여들었다. 사람의 말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를 내는 자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나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는 이렇게 물었다.
“이곳에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9간들은 응답했다.
“우리들이 있다.”
소리는 또 물어 왔다
“내가 있는 이곳이 어디인가?”
그들은 응답했다.
“구지봉이다.”
소리는 또 말했다.
“황천께서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임하여 나라를 새롭히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위의 흙을 파면서 이렇게 노래하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래.
이 노래(현재 <구지가>란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음)를 외치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너희들은 기뻐 날뛰게 될 것이다.“
9간들은 그 말대로 모두 기쁘게 노래부르고 춤추었다. 노래하고 춤춘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우러러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자색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 땅으로 닿아 왔다. 줄 끝을 찾아보았더니 붉은 보에 싸인 금합이 매달려 있었다. 그 금합을 열어 보았다. 해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했다. 그리고 그 알들을 향해 수없이 절들을 했다. 조금 있다 도로 보에 싸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갔다. 탑상에다 놓아두고 무리들은 각기 흩어졌다. 꼭 하루를 지나 이튿날 아침에 무리들은 다시 모여들었다. 그리고 금합을 열어 보았다. 여섯 개의 활금알은 사내아이들로 화해 있었다. 용모들이 매우 준수했다. 상에 앉히고 무리들은 절을 드려 치하했다. 그리고 공경을 다해 모셨다. 사내아이들은 날마다 커 갔다. 10여 일이 지나갔다. 신장이 9척, 이것은 은나라의 성탕과 같았다. 얼굴이 용 같은 것, 이것은 한나라의 고조와 같았다. 눈썹이 여덟 가지 색으로 된 것, 이것은 당의 요제와 같았다. 그리고 눈의 동자가 둘씩 있는 것은 우의 순제와 같았다.
그달 보름날에 즉위했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 했다. 또는 ‘수릉’(수릉은 붕어한 뒤의 시호임)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고 불렀다. 곧 6가야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돌아가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을 경계로 하고 남쪽에 위치하여 우리나라의 꼬리 부분이 된 곳이 가야의 영토다. 왕은 가궁을 짓게 하여 들어가 거쳐했다. 질박, 검소하게 하려고 풀로 이은 지붕에 처마를 자르지 않고, 흙으로 된 계단은 석자를 넘지 못했다(‘풀로 이른 지붕…….’ 한 것은 중국 오제에 관한 기록의 한 토막을 차용한 것이므로 글 자체에 너무 구애 받지 말아야 할 것임).
- 다음 화에 계속 -
<<삼국유사>> 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