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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 선덕왕의 예지 세 가지, 향기 없는 모란꽃, 첨성대, 선덕여왕,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제37대 덕만의 시호는 선덕여대왕, 성은 김씨, 진평왕의 따님으로 부왕을 이이 당 태종 6년에 즉위했다. 이 여황은 나라를 다스리는 15년 동안에 세 번 앞일을 예지한 것 세 가지가 있다. 당나라 태종이 홍색, 자색, 백색, 이 삼 색의 모란꽃을 그린 그림과 그 씨앗 석 되를 보내 왔다. 선덕여왕은 모란꽃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씨앗을 궁전 뜰에 심어 보게 했다. 꽃이 피어서 지기까지 과연 향기라곤 없어 선덕여왕의 그 예언은 맞았다. 이것이 세 가지 예지인 것 중의 그 첫째다. 추운 겨울날이다. 영묘사(경주시 성진리에 있었다. 선덕왕 즉위 1(632)년에 창건, 찰간지주가 남아 있음)의 옥문지에는 난데없는 개구리 떼가 모여들어 3, 4일을 두고 울어댔다. .. 더보기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진지왕의 정사, 신라 사륜왕, 귀신을 보는 도화랑의 아들 비형,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사륜왕은 신라 제25대 임금으로 성은 김씨, 시호를 진지대왕이라 했다. 그 왕비는 기오공의 딸 지도부인이었다. 진나라 선제 8(576)년(고본에는 선제 11년이라고 되어 있으나 잘못임)에 즉위하여 나라 다스리기를 4년, 정치는 어지러워지고 왕은 쾌락에 방종하기만 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려 버렸다. 사륜왕이 왕으로 군림해 있을 때다. 사량부의 일개 민간 여자의 얼굴이며 맵시가 복사꽃마냥 요염하게 생긴 한 여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도화랑이라 불렀다. 사륜왕은 도화랑의 아름다움을 전해 듣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사통을 요구해 왔다. 사통을 요구해 오는 사륜왕에게 도화랑은 또렷이 말했다. “여자가 지켜야 할 것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옵니다. 지아비를 두고 다른.. 더보기
지철노왕(智哲老王), 왕후 간택의 이야기, 울릉도 정벌, 나무 사자로 오랑캐들을 두려움에 떨게함,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지철로왕은 신라 제22대 임금이다. 왕은 그 음경의 길이가 무려 한 자 다섯 치나 되어 왕후가 될 짝을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내 삼도에 사자들을 보내어 왕후가 될 짝을 구해 오도록 했다. 사자가 모량부에 있는 동로수 아래에 이르렀을 때 개두 마리가 크기가 북만큼이나 한 인분덩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는 으르렁대며 먹고 있었다. 사자는 그 인분덩이의 임자가 필경 거인일 테고 그것이 여자라면 지철로왕의 짝이 될 만하겠다고 생각하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있다가 모량부 상공의 딸이 그곳에서 빨래를 하다 수풀 속으로 들어가 눈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사자가 모량부 상공의 집을 찾아가 살펴보았더니 놀랍게도 그 딸은 신장이 일곱 자 다섯 치나 되는 거인이었다. 돌아가 왕에게 사실을 알렸.. 더보기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김유신 장군 혼령, 댓잎사귀를 귀에 꽂은 병정들, 화랑의 전신,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신라 제14대 임금 유리왕 때의 일이다. 이서국 사람들이 서울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 쪽에서도 대거로 방어에 나섰으나 오래 버티어 낼 수 없었다. 홀연히 어디에서 온지도 알 수 없는 신기한 병정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지원해 왔다. 그 신기한 병정들은 모두 댓잎사귀를 귀에 꽂고 있었다. 그들은 신라군과 힘을 합하여 적군을 쳐부수었다. 적군들이 물러간 뒤 그 신기한 병정들은 또 온데간데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다만 미추왕릉 앞에 무수한 댓잎사귀만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제사 귀에 댓잎사귀를 꽂고 왔던 그 신기한 병정들이 미추와 현령의 공임을 알았다. 그래서 미추왕릉을 ‘죽현릉(댓잎 꽂은 병정들이 나타난 능)’이라 불렀다. 제36대 임금 혜공왕 15(779)년 4월 어느 날,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서 갑.. 더보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 신화, 허왕후, 아유타국, 6가야 신화, 구지가, 가락국가의 흥망성쇠 - 4/8 - 4/8 왕후는 중궁을 거처로 정했다. 시종해 온 신하들 부처와 사속들에게는 널찍한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게 하고, 나머지 종자들은 20여 간짜리 빈관 한 채에다 사람수를 배정, 구별지워 들이어선 날마다 풍부한 음식을 주었다. 싣고 온 진기한 물건들은 내고에다 간수해 두고 왕후의 네 철 계절에 따른 소요에 당하도록 했다. 어느 날, 왕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들은 다 백관의 장들이나 그 직위며 명칭이 도시 촌스러워 결코 벼슬자리에 있는 귀인의 칭호라곤 할 수 없다. 혹 어쩌다 문명된 외국인이 전해 들으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되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드디어 아도를 아궁으로, 여도는 여해로, 피도는 피장으로, 오도는 오상으로 고치고, 유수와 유천의 이름은 윗글자는 그냥두고 아랫자만 고쳐 각각 유공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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