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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 3.1 운동, 유관순 열사, 삼일 운동, 독립 운동,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대한민국만세, 서대문 형무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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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 이란?

1919년 3월 1일부터 약 1년 동안
일제의 지배에 대항하여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민족의 독립운동이다.
3.1운동은 일제감정기때 나타난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었으며
3.1 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되다.

 

광혜원에서 퍼진 3.1 운동

* 유관순은 누구인가?

일제감정기의 독립운동가로
3.1 운동에 참여하며 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그 일로 일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18세의 어린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전인 1902년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이었던
17세의 유관순도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1 운동으로 인해 일제가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자 유관순은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마침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유관순은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함께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이 몰려와 만세 부르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고 칼로 찔렀다.
이때 유관순은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고 말았다.
셔대문 형무소에 와서도 만세를 부르며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유관순은
결국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 3.1 운동의 배경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자기 민족의 운명은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
식민지 지배를 받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큰 희망을 품게 되었다.
또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한가운데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 사건을 “2.8 독립 선언” 이라고 한다.
그들의 용기에 많은 사람들은 감동하였고
이를 계기로 3.1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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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 세계로 퍼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에서
각 종교지도자들로 구성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같은 시간 서울 탑골 공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게 시작된 3.1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멀리 만주와 연해주, 미국에 사는
동포들까지 만세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만세 운동에 당황한 일제는
헌병 경찰을 앞세워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끌고 갔다.

 

* 3.1 운동의 의의와 영향

3.1 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더불어 3.1 운동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의 독립 염원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3.1 운동의 영향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더욱
다양하게 전개 되었다.
그리고 더욱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3.1 운동의 모습을 본 독립 운동가들은
흩어져있던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세웠다.
김구와 이승만 등이 중심이 되었다.
임시 정부는 외교관을 파견하여
일제의 침략이 잘못된 것임을 세계에 알렸고
독립신문을 만들어 임시 정부의 활동을
알렸다.
또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한국 광복군> 이라는 군대도 만들었다.

 

* <한인 애국단> 이란?

<한인 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조직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일제의 주요 인물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봉창의사는 일본 도쿄에서
일본 국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순국하였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는 중국 상해에서
열린 일본군의 상해 점령 축하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지며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인 애국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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