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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가야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 신화, 허왕후, 아유타국, 6가야 신화, 구지가, 가락국가의 흥망성쇠 - 8/8 - 8/8 왕은 사과했다. “그 말이 옳다.” 용녀를 물리쳐 하산도로 귀양 보내고 그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나라를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 나라를 다스리기 15년, 영초 2년 신우(421) 5월 12일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도녕대아간의 딸 복수며, 아들 취희를 낳았다. 취희왕, 또는 질가, 영초 2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기 31년, 원가 28년, 신묘(451) 2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각간의 딸 인덕이며, 왕자 질지를 낳았다. 질지왕, 또는 김질왕, 원가 28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세조의 비 허황옥 왕후를 위해 그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가 처음 시조와 결혼했던 곳에 절을 세워, 왕후사라 하고, 밭 10결을 바쳐 비용에 충당하게 했다. 나라를 다스리기 42년 영명 .. 더보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 신화, 허왕후, 아유타국, 6가야 신화, 구지가, 가락국가의 흥망성쇠 - 7/8 - 7/8 이 절이 세워진 지 500년 뒤에 장유사를 세웠는데 그 절에 귀속된 전토며, 임야가 모두 300결이나 되었다. 그러자 이장유사의 삼강(절에서 대중을 통솔하여 규칙을 유지하는 세 가지 직책으로서 상좌, 사주, 도유나가 그것임)이 왕후사가 자기네 절 임야의 동남쪽 푯말 안에 위치되었다고 해서 그 절을 철폐시켜 농장으로 만들고는 추수와 저장의 장소로, 마소를 기르는 외양간으로 썼던 것이다. 실로 슬픈 일이다. 시조 이하 9대 손의 역수는 아래에 자세히 기록했다. 사적을 새긴 문구는 이러하다. 혼돈이 처음 열리고 해와 달이 밝게 빛나고 인륜이 비로소 생겼으나 임금의 지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왕조가 벌써 여러 대를 지냈는데도, 동국에서는 아직 서울이 갈려 있었다. 신라는 먼저 정해지고, 가.. 더보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 신화, 허왕후, 아유타국, 6가야 신화, 구지가, 가락국가의 흥망성쇠 - 6/8 - 6/8 수로왕이 붕어한 후한 헌제 10(99)년에 처음 축조된 때로부터 금상께서 치세하신 지 31년째, 즉 요의 도종 즉위 22(1076)년에 이르도록 878년 동안을 수로왕의 능원은 그 봉토가 헐어지지도 무너지지도 않고 있으며 그 심은 나무들은 말라죽지도 썩지도 않고 있다. 더욱이 진열된 갖가지 보물들도 또한 훔친 것이라곤 없다. 이로써 보면 신체부(당나라 예종 때의 사람)가 말한, ‘예로부터 이제에 이르도록 어찌 망하지 않는 나라, 허물어지지 않는 무덤이 있었을까 보냐’라는 말은 다만 가락국이 망했다는 사실에서는 그 말이 맞지만 수로묘의 허물어지지 않는 사실에서 보면 체부의 말은 전적으로 긍정되지 않는다. 게다가 또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이면 이곳 지망민과 이속들은.. 더보기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 신화, 허왕후, 아유타국, 6가야 신화, 구지가, 가락국가의 흥망성쇠 - 3/8 - 3/8 문득 가락국 앞 서남쪽 해성에서 묽은 빛깔의 돛을 걸로 붉은 빛깔의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향해 오는 배가 있었다. 망산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천간 등은 먼저 횃불을 올렸다. 배는 마구 내달아 와 앞을 다투어 상륙하려 했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은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궐로 달려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듣고서 흔흔히 기뻐했다. 그리고 9간들은 보내어 좋은 배를 내어 영접해 오게 했다. 9간들이 즉시 대궐로 모셔 들이려 하자 왕후는 입을 열었다. “나와 그대들은 평소 안아온 터수가 아닌데 어찌 경솔히 따라가겠소?” 유천간 등은 돌아가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왕후의 말이 그렇듯 여겨져 당해 관헌들을 데리고 대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으로 가서 만전(장막으로 친, 임금의 임시 거..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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