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지통사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지통사와 낭지사 이야기, 삼국유사,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2/2 - 2/2 원효가 찬술을 끝마쳐 문선이란 은사를 시켜 낭지법사에게 책을 받들어 보내면서 그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계송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서쪽 골짜기의 사미(반고사는 영취산의 서북쪽에 있기 때문에 ‘서쪽 골짜기의 사미’라 했으니 바로 원효 자신을 가리킴)는 머리를 조아려 예 드리옵나니동쪽 멧부리의 상덕 고암전에 미세한 먼지를 불어 영취산에 보태고(자기가 찬술한 ‘초장관문’ 및 ‘안신사심론’의 불계에 대한 이바지를 겸사투로 말한 것임)작다란 물방울을 날려 용연에 던지나이다. 영취산의 동쪽에 태화강이 있다. 바로 중국 태화지의 용을 위해 복을 비는 절을 그 언저리에 세운 바 있기 때문에 원효의 게송에서 그 강을 가리켜 ‘용연’이라고 한 것이다. 지통과 원효는 모두 대성들이다. 두 성인이 경의를 다하여.. 더보기
낭지승운(朗智乘雲), 보현수(普賢樹), 지통사와 낭지사 이야기, 삼국유사,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1/2 - 1/2 삽량주 아곡현(삽량은 지금의 양주요, 아곡의 ‘곡’은 한편 서‘자로 쓰이기도 했고, 또는 ’구불‘, ’굴불‘이라고도 했음. 지금 울주에 굴불역이 있으니 아직도 그 이름이 쓰이고 있음. 삽량, 즉 양주는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임)에 있는 영취산에는 한 신통한 승려가 살고 있었다. 그 승려가 암자를 짓고 그 산에서 살아온 지가 여러 해였으나 고을에선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 스님 또한 자신의 성명을 말하지 않았다. 항상 법화경>>을 강하고 있어 신통력이 있었다. 당 고종 12, 즉 문무왕 즉위 (661)년에 지통이란 사미가 있었는데 그는 본래 이량공의 집 종이었다. 승려가 되던 해 그의 나이 일곱 살, 그때에 한 까마귀가 그에게로 날아와 이렇게 짖었다. “영취산으로 가서 낭지의 제자가 되라.”..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