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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여부남(餘扶南), 즉 전백제(前百濟), 백제의 건국과 흥망성쇠, 주몽의 아들 온조와 비류,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2/2 - 2/2 온조는 하남 위례성(지금의 직산. 하남 위례가 직산이라는 설은 일찍이 그릇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남 위례는 현재의 광주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서 그 열 사람의 신하들을 그의 보익으로 하여 군호를 ‘십제’라 했다. 그것은 한나라 성제 15(기원전 18)년의 일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짰기 때문에 안거할 수가 없어 되돌아왔다. 돌아와, 바야흐로 위례에 도읍이 자리 잡히고 인민들이 편안히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마침내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죽고 말았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백성들이 즐거워했다고 해서 그 뒤 국호를 ‘백제’(국호인 백제는 그 이전 백제의 명칭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여기 ‘백성들이…….’ 운운한 한자에 구애된 부회일 것.. 더보기
여부남(餘扶南), 즉 전백제(前百濟), 백제의 건국과 흥망성쇠, 주몽의 아들 온조와 비류, (어른들이 읽는 삼국유사) - 1/2 - 1/2 부여군은 전 백제의 왕도다. 또는 소부리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를 보면 ‘백제 성왕 16(538)년 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 하고, 그 주석에 ‘그곳 지명은 소부리,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이요, 소부리란 부여의 별호다.’ 라고 했다. 또 양전장적(고려 시대의 토지 측량 대장)을 보면 소부리군 전정주첩이라고 씌어 있으니 오늘날 부여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옛 이름을 회복한 것이다. 백제 왕족의 성이 부여씨이기 때문에 그렇게 알려진 것이다. 또는 또 여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 부여군의 서쪽 자복사의 고좌에 수장이 있어 그 자수 무늬에 통화 15년 정유 5월 여주 공덕대사 수장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이다. 또 옛적에 하남에 임주 자사를 두었는데, 그때의 도적 속에 ‘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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