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 벼슬을 사퇴하다>
효성왕이 아직 등극하기 전, 현량한 선비 신충과 함께 대궐 뜰에 있는 잣나무 아래에서 곧잘 바둑을 두곤 했다. 어느 날 신충에게 말했다.
“후일 등극하는 날에 내가 만일 그대를 잊는다면 이 잣나무와 같으리라.”
신충은 일어나 배사했다. 두어 달 뒤에 효성왕은 즉위했다. 그리고 공신들에게 상작을 내렸다. 그런데 왕은 신충을 잊어버리고 상작의 대상에서 빠뜨렸다. 신충은 원망에 잠겨 시가(신충이 지은 시가는 ‘원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음)를 지어 잣나무에다 붙였다.
‘뜰의 잣이 가을에 안 이울어지매 너를 어찌 잊을꼬’ 하시던 우러러보던 얼굴이 계시온데,
달그림자가 옛 못의 가는 물결 원망하듯이
얼굴이사 바라보나, 누리도 싫은지고!
이 시가를 잣나무에 붙이자 싱싱하던 그 잣나무는 갑자기 누렇게 말라들었다. 왕은 이상스러워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게 했다. 신충이 써 붙인 시가를 발견하여 바쳤다. 왕은 놀랐다.
“온갖 정사에 분망하노라 하마터면 친족을 저버릴 뻔해군!”
이에 신충을 불러 작록을 주었다. 그러자 그 잣나무는 되살아났다. 이로 말미암아 신충은 양조에 걸쳐 대단한 총애를 받았다.
경덕왕(경덕왕은 바로 효성왕의 아우임) 즉위 22(763)년, 신충은 그의 두 벗과 약속하고서 벼슬을 사퇴하고 남악(지리산을 가리킴)으로 들어갔다. 왕이 거듭 불렀으나 다시는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선 왕을 위해 단속사를 세우고 거기에 정주했다. 그리하여 그는 산곡간에서 몸을 마치면서 대왕의 복이나 빌겠다고 하기에 왕은 허락해 주었다. 단속사의 금당 뒷벽에 진영을 두었으니 이것이 경덕왕의 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절 남쪽에 한 마을이 있어 이름을 ‘속휴’라 했는데 이것은 물론 세속과 인연을 끊은 신충의 일에서 유래해 온 명칭이다.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라고 부르고 있다(<<삼화상전>>을 보면 신문왕대에 창건한 신충 봉성사와 여기 이것을 혼동하고 있는데, 따져보면 신문왕대는 경덕왕대에서 100여년이나 앞섰고, 더구나 신문왕과 신충과의 사이는 숙세의 관계이고 보면 여기 이 신충이 아님을 알 수 있음).
별기에 의하면 겅덕왕대에 직장 이준(<<고승전>>에는 이순이라고 했음)이란 이가 일찍이 나이 50이 되면 꼭 출가하여 절을 세우겠다고 발원하더니 당 현종 36년, 즉 경덕왕 즉위 7년에 나이 50이 되자 조연사를 개창하여 대찰로 만들어 단속사라 이름하고, 그리고 자신 역시 삭발했다. 법명을 공굉장로, 20년을 그 절에 머물다 죽었다고 한다.
단속사의 창사연기에 대해 앞의 <<삼국사>> 소재와 같지 않으므로 두 가지 기록을 그대로 실어 의심을 없앤다.
찬한다.
공명을 마저 누리기 전에 살쩍이 먼저 희어지네.
군왕의 종애야 많지만 죽음에의 길이 바쁘구나.
바라다 뵈는 저 산이 줄곧 꿈속에 어리어 왔나니,
가서 향불 올리며 우리 임금 복 비 오리.
- 끝 -
<<삼국유사>>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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